거래업체 부도나면 흑자기업도 연쇄 도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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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전자부품 생산업체인 C사의 박모사장은 요즘 할 말을 잊은지 오래다.

4년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새로 사업을 시작할때만해도 잘 풀려나가 중소기업 단체에서 주는 우수 경영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꿈은 올해초 거래업체의 연이은 부도로 물거품이 돼 버렸다.

지난 한해 동안 막은 타업체 부도어음만 10억여원. 특히 지난해말 부도가 난 해태전자로부터 받은 7억원짜리 어음이 결정타였다.

박사장은 "해태측이 5년거치 분할 상환을 한다고 하지만 지금 당장 쓰러질 판에 무슨 소용이냐" 고 분통을 터뜨렸다.

'어음사슬' 의 폐해는 하청관계로 맞물린 유통업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지난 3월 부도처리된 미도파백화점의 경우 이 회사가 발행한 어음에 대한 지급이 전면 동결되면서 1천6백여개에 달하는 중소 협력업체들은 연쇄도산의 위기에 놓여있다.

대부분 평균 75일짜리 어음을 받아두고있는데 이달말 만기가 도래해 모두 걱정이 태산같다.

최근 중소기업의 주요 결제수단으로 쓰이고있는 어음이 고유의 결제 기능을 잃어버린 채 기업들을 연쇄부도의 구렁텅이로 내모는 '지뢰밭' 으로 변하고있다.

"경영을 잘못해 망했다면 할 말이 없죠. 자금관리를 잘못한 게 죄라면 죄가 되겠지만 어음을 안쓰고 어떻게 거래를 합니까. " 최근 흑자도산한 피혁업체의 사장은 "흑자를 내던 멀쩡한 기업이 다른 업체의 부도어음을 끌어안은 채 도산하는 것은 금융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것" 이라고 항변한다.

실제로 지난 한해동안 국내 중소기업중 어음을 잘못받아 부도를 낸 기업이 4천5백여개사에 이른다.

전체 도산기업의 37%에 달하는 것이다.

부도가 나지는 않았지만 휴지조각이 돼버린 남의 어음때문에 부도위기를 겪는 기업들도 하나 둘이 아니다.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가 640개의 중소제조업체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올들어 지난달 10일까지 69일간 납품대금으로 받은 어음 중 부도가 나서 휴지조각이 된 어음은 업체당 1억6천만원에 달했다.

이같이 어음의 장점보다는 폐해가 두드러지자 차제에 어음제도를 전면적으로 개선하거나 아예 폐지할 것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한국경제연구원이 최근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중소기업의 45%가 어음제도의 폐지에 찬성했으며, 절반이상 (51.4%) 이 '어음제도를 폐지하더라도 당분간은 혼란이 예상되나 극복이 가능할 것' 이라고 응답했다.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는 일시에 어음제도를 폐지할 경우 오히려 중소기업의 자금난을 가중시킬 우려가 있는만큼 각 기업별로 어음발행 한도제를 먼저 도입, 불량어음의 남발을 막는 것부터 우선돼야한다고 지적하고있다.

한국경제연구원 남주하 연구원은 "어음의 남발을 막기위해 일본식의 어음발행 부담금을 신설해야 한다" 며 "어음 금액의 0.02~0.03%에 해당하는 인지세를 부과하고 이 자금으로 어음보험의 기금으로 활용하는 게 바람직하다" 고 제안했다.

김준현.윤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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