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빈 수레를 끄는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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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문민정부 초기의 개혁정책을 정치사학자들은 무엇이라고 설명할까. 무지 (無知) 의 개혁드라마라고 말할지 모른다.

국민의 정부 초기의 '북풍사태' 는 어떻게 설명할까. 저급 (低級) 의 정치모델로 꼽을지 모른다.

작금의 정치는 '진실' 의 가치도 모르고 '현실' 의 냉엄함도 모르고, 그저 저질스러운 일로 요란만 떨고 있기 때문이다.

진실은 거짓으로 은폐되거나 조작으로 왜곡돼서는 안된다.

그러나 진실을 밝힌다는 것이 모든 가치를 우선하는 절대선 (絶對善) 은 아니다.

더욱이 아무도 진실을 덮어 둬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진실을 밝힌다는 말로 온통 세상이 시끄러울 이유가 없다.

최고 국가정보기관이 국내 정치공작을 위해 북쪽과 내통했다면 한심하고 부끄러운 일이다.

이에 관한 정보기관 문건이 정당으로 흘러 나오고, 정당간부는 한건주의 관성으로 이를 폭로하고, 국회와 정당이 온통 이 문제에 매달려 있다.

문민정부때 역사 바로세우기 정책이 있었다.

역사가 누워 있었던 것도 아닌데 바로세우기를 한다고 요란스러웠다.

무슨 기 (氣) 를 끊으려 했다는 쇠말뚝을 뽑아 내고, 무슨 건물은 이러저러해서 철거하고…. 북풍이라는 공작이 불가피했을 것으로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그 저급한 공작의 진실을 밝히자는 대응도 저급하다.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은 좀 시끄러워도 짚고 넘어가야 한다" 는 생각은 단세포적 논리다.

"새 정권의 초기에는 과도기적 현상이 불가피하다" 는 얘기는 근거없는 자기합리화다.

그렇게 한가로울 수 없는 게 우리 현실이다.

많은 기업들이 금년 또는 내년말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를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다.

일부 외국전문가들은 한국경제의 회생을 낙관하지 않는다.

다시 늘고 있는 해외여행과 거리의 자동차를 보고 "우리는 더 혼나야 한다" 는 자학의 소리도 나오고 있다.

이 냉엄한 현실 앞에 요란한 것은 '북풍' 뿐이다.

세상이 요란하면 흔히 그 탓을 언론에 돌린다.

그런 일면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북풍' 에 관한 한 언론을 탓할 수는 없다.

'북풍' 과 관련해 정당의 간부회의가 매일 열리고, 청와대와 정당의 대변인이 지긋지긋하게 많은 성명을 내고 - 심할 때는 하루에 5~6건씩 - 검찰간부도 이 사건 수사와 관련해 하루가 멀다 하고 기자회견을 갖는다.

주요 국가 공기관이 '북풍' 에 매달려 있으면서 언론 때문에 시끄럽다고 말할 수는 없다.

미국 빌 클린턴 대통령의 성 스캔들에 관해 미국이 떠들썩해 보인다.

그것도 진실을 밝히자는 얘기다.

그러나 그 떠들썩함은 방송의 코미디 프로와 신문의 만화로 풍자가 난무할 뿐이지 의회.검찰.CIA.정당이 몽땅 법석을 떨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언제까지, 얼마만큼 시끄러워야 하나. 아마 조용해지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우리 정치는 그만한 조정능력을 스스로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은 취임 한달 간담회에서 북풍문제 처리에 관해 언급했다.

"조사내용을 국민에게 밝힌 뒤 국민의 여론을 참작해 결론을 내리겠다" 고 했다.

조사가 끝나면 법에 따라 처리하는 것이 법치의 정론이다.

그런데 여론을 참작하겠다니 조용히 마무리되기는 틀린 얘기 같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절박한 현실의 문제가 없다면 '북풍' 의 진실을 밝히는 일로 시끄러워도 상관없다.

전직 안기부장의 할복을 놓고 그 해석이 분분해도 좋다.

그러나 그 '진실' 보다는 우리 '현실' 이 너무나 냉엄하다.

검찰이 북풍조사를 맡았으면 조용히 조사를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국회가 꼭 이 문제를 다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권은 이 검찰조사를 일단 기다려 봐야 한다.

할 일도 많은 국회, 할 일도 많은 안기부장의 첫 대면이 저질의 문건열람으로 시간을 보냈으니 딱한 일이다.

빈 달구지는 소리만 요란하다.

우리 정치가 끌고 있는 빈 달구지 소리는 외국에까지 들리고 있다.

잘 이해가 안되는 소리로도 들리고, 조소를 머금게 하는 소리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우리 경제현실에 악영향을 줌에는 틀림없다.

달구지를 끌고 있는 정치지도자들은 달구지에 무거운 경제의 짐을 싣기로, 그래서 북풍의 빈소리가 요란하지 않게 하기로 심기일전할 수 없을까.

김동익<성균관대 석좌교수.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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