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원 칼럼]'외환위기' 미국의 음모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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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아직도 미국이 아시아의 외환위기를 음모했다고 믿는 사람이 적지 않은 것같다.

말레이시아 마하티르 총리는 소로스같은 미국 금융세력이 의도적으로 아시아의 금융질서를 파괴하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당선자는 소로스를 일산자택에서 환대함으로써 한국 외환위기가 국제음모의 결과라고 믿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나라에는 아직도 아시아의 외환위기가 미국의 음모에 의해 발생했다고 믿는 사람이 적지 않은 것 같다.

생각해 보면 그도 그럴만 하기도 하다.

우리 국민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가 갑작스럽게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기에 이런 날벼락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나라의 노동시장은 경직돼 있고 재벌기업들은 빚더미 위에 올라앉아 있다지만, 이런 문제들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과거에도 항상 있어 온 문제들이 아닌가.

아무래도 미국이 뒤에서 조종하지 않는다면 태국.인도네시아.한국 등 아시아 국가들이 이처럼 동시에 외환위기를 맞게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런 의문을 속시원하게 풀어주는 답이 바로 음모설이다.

냉전종식 이후 미국은 러시아의 위협 대신 중국의 고도성장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져왔다.

중국이 지난 20년간의 성장속도를 계속 유지한다면 21세기에는 중국경제가 미국경제보다 더 커질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따라서 미국은 중국의 성장을 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의 성장을 늦추기 위해서는 동남아 화교들의 자본이 중국에 유입되는 것을 막아야 하기 때문에 미국은 이번에 동남아 금융위기를 일으킨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언뜻 보기에는 그럴듯한 추론이나 증거도 없을 뿐만 아니라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는다.

만일 중국에 자본이 들어가는 것을 막는 것이 목표였다면 대만에도 금융위기가 있어야 하는데, 널리 알려진 대로 대만에는 금융위기가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들을 도와주겠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있다.

미국이 일본을 견제하려고 금융위기를 조종했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아시아 은행들의 지불능력에 문제가 생기면 일본은행들이 타격을 받게 되고 동남아에 투자한 일본자본이 위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일본은행들이 손실을 보면 미국은행도 타격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은 지적하지 않는다.

미국은 아시아의 경제발전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미국의 보호무역주의자들 가운데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시아 경제는 금융위기의 결과로 수출을 더 많이 하지 않을 수 없게 됐고 환율절하로 대미 (對美) 수출은 더 용이하게 됐다.

그러니까 미국의 보호무역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아시아의 금융위기는 그들이 원하는 상황에 정반대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궁극적으로 미국과 아시아 경제는 매우 복잡한 상호의존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아시아의 금융위기는 미국의 소비자에게는 수입품의 가격을 인하해 주었고, 납세자에게는 국제통화기금 (IMF) 분담금을 위한 압력을 가해주었으며, 수출업자에게는 아시아국가들의 수요격감을 가져왔으며, 금융업자들에게는 새로운 위험과 더불어 새로운 돈벌이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다.

그리고 미국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한편 현재의 국제금융질서의 안정을 유지하는 책임이 더욱 막중해졌고 다른 한편으로는 금융위기가 안보질서를 위협하지 않도록 해야 하는 매우 복잡하고 델리케이트한 도전에 직면하게 됐다.

이렇게 보면 미국이 아시아의 금융위기를 원했을 이유는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모설을 믿는 이유는 금융위기에 대한 우리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심리적 충동이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나 우리나라 노동시장은 유연성이 없고, 재벌기업은 비능률적이며, 금융부문은 불투명.불건전하고 정부는 감시.감독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역기능적인 간섭과 규제만 했다는 것은 우리들이 다 아는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오늘의 위기에 대한 책임이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한 필요한 개혁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김경원 〈사회과학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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