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신뢰와 국가발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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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최근 우리 주변에서 가장 자주 접하게 되는 단어의 하나가 바로 '신뢰 (信賴)' 다.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외환.금융위기가 국제사회에서 우리 기업과 금융기관, 그리고 우리 정부의 대외지불능력에 대한 신뢰도가 급격히 떨어진 데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이 신뢰란 정말 유용하고 귀한 것이다.

서로 신뢰하는 사이에는 할 말, 못할 말이 따로 없고 각종 거래도 쉽게 이루어진다.

이것은 비단 대인관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정부와 기업, 기업 상호간, 기업과 금융기관간, 금융기관과 금융기관간의 관계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일찍이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케네스 애로 교수는 신뢰는 어느 사회에서나 '중요한 윤활유' 와 같은 것으로 그 사회체제의 효율성과 생산성을 높인다고 지적한 바 있다.

또 '신뢰' 라는 저서를 낸 프랜시스 후쿠야마 교수는 신뢰를 모든 거래비용을 줄여주는 사회적 자본으로 규정한다.

이것은 신뢰도가 낮은 사회의 모든 거래가 복잡한 계약절차, 계약불이행에 따르는 제반 법적절차와 이에 수반하게 될 비용을 생각하면 곧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신뢰는 국내에서뿐 아니라 국제사회에서도 거래비용을 줄여주는 윤활유 역할을 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할 것은 신뢰는 돈으로 살 수 없고 빌릴 수도 없을 뿐 아니라 한번 실추된 신뢰를 회복하는 데는 상당히 고통스런 노력과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오늘의 급박한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나아가 우리 경제의 지속적 발전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신뢰 회복을 위한 조치는 외부 압력이 없더라도 우리 스스로를 위해 하루속히 추진해 나갈 수밖에 없다.

우선 우리의 대외지불 능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우리 경제의 전반적인 경쟁력 향상에 필요한 조치들을 신속히 추진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정부 스스로의 생산성 향상을 위한 조직 개편과 공무원 임용.인사제도의 개혁, 기업활동에 걸림돌이 되는 각종 규제 혁파, 기업활동을 조장할 수 있는 일관성 있고 예측 가능한 경제정책 집행 등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 금융의 건전성 확보와 금융기관의 부실예방을 위한 적절한 금융감독체계 마련을 서두르는 것도 중요하다.

이와 아울러 부실금융기관 처리와 금융기관 경쟁력 제고를 위한 인수.합병 (M&A) 허용도 신속히 이룩돼야 한다.

그리고 돈을 빌리는 주체로서 기업이 무한경쟁시대에 걸맞은 전문화와 자기자본 확충을 통한 재무구조 건전화 계획을 수립.추진하는 일도 중요하다.

이와 아울러 노동시장의 유연성 확보와 사회안정망을 강화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정부와 기업, 그리고 금융기관의 대외지불 능력을 가늠할 수 있는 모든 통계와 정보에 관한 투명성 확보를 위한 조치들도 추진돼야 한다.

자기의 진면목을 숨기기 위해 자신에 관한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 개인이나 기업을 누가 신뢰하겠는가.

정부의 외채총액과 장.단기 외채구성비, 외환보유고 실상 등에 관한 자세한 통계의 공표와 기업.금융기관의 재무제표를 국제규범에 맞게 작성하고 재벌 계열기업의 결합재무제표 작성도 불가피한 것이다.

결합재무제표가 작성.발표될 때 계열기업간의 상호지급보증과 차입 위주의 방만한 경영문제는 거의 자동적으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외채와 외환보유고에 관한 정확한 통계가 발표돼 왔다면 오늘의 외환위기도 회피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본다.

이는 정확한 정보를 기초로 한 자율적 시장기능과 전문가들의 사전 경고에 따른 적절한 대응책 마련이 불가피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차제에 특별히 기밀을 요하지 않는 각종 정부자료.통계를 의무적으로 공개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본다.

어쨌든 우리 국민 모두가 고통을 참으며 추진해 나가야 할 이러한 제반조치들은 당면한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것임과 동시에 장기적인 국가발전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공일 〈세계경제硏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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