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재현의 시시각각

‘공죄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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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권력과 돈, 이권이 뒤엉켜 돌아가는 우리나라 정계·관계를 위해서도 그런 으스스한 곳이 하나쯤은 있어야겠다는 생각이다. 부패의 유혹에 흔들리던 어느 순간 눈에 낀 백태가 확 벗겨지는 곳, 코앞의 이익보다 긴 앞날의 명예를 생각하게 해주는 곳, 천망(天網)이 어림짐작보다는 훨씬 촘촘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그런 장소.

과거에는 없이 살아서 그렇지 뒤탈 걱정할 일은 없던 순박한 서민들도 길 가다가 고개 숙이고 자신을 돌아보는 장소가 많았다. 동네 어귀마다 있던 서낭당이 그중 하나였다. 돌 하나 더 얹어놓고 소원 빌고 돌아서노라면 왠지 마음이 한 뼘쯤은 더 착해지고 순해졌다. 큰 절간이나 산속에 있던 산신각도 비슷하다. 곳집·상둣도가라고도 불리던 마을 후미진 곳의 상엿집은 또 어떤가. 꼬마들은 밤중에 상엿집 혼자 다녀오기 내기로 담력을 겨뤘다. 공포와 공명심 사이에서 덜덜 떨면서 상엿집으로 난 밤길을 걷노라면 딱히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앞으로 착하게 살겠습니다’라고 빌게 된다. 머잖아 상여 신세를 지게 될 동네 어른들 입장에서야 더 말할 것도 없다.

산신각·칠성각의 오랜 전통도 있는데 각(閣) 하나 더 세운다 해서 이상할 게 없다. 무속신앙 같은 종교적 의미가 밴 것도 아니고, 부정부패 없애고 세금 낭비 막자는 취지니 만들 가치가 충분하다. 이름은 ‘공죄각(功罪閣)’이다. 동시대에 커다란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킨 사건이나 정책, 대형 역사(役事)에 관한 모든 것을 이 각에 보관해 두는 것이다. 사회적 대립이 첨예했던 사안일수록 좋다. 지금은 찬반이 팽팽하지만 1·2년 뒤, 또는 다음 정권에서 잘잘못을 가릴 수 있는 것들 말이다. 예를 들면 제2롯데월드 건립 논란 같은 게 대상이다. 정부는 안전하다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는 사람들도 많으니, 정부·군·학자들까지 관련된 모든 사람들의 행적과 발언을 공죄각에 모아 두는 거다. 길어야 10년 안에 공인지 죄인지 판정 날 것이고, 그에 걸맞은 ‘대접’을 하면 된다.

우리에게는 오랜 실명제 전통이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수원 화성이 산 증거다. 조선왕조는 화성 건설공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기록으로 남겼다. 공사 참여자의 이름은 물론 석공(石工)들의 출신지와 경력, 품삯까지 기록했다. 이런 전통을 국가정책 집행 과정과 세금의 쓰임새, 대통령·장관의 일거수일투족에 적용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혹자는 이미 국가기록원이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국가기록원의 비공개 자료는 한 세대(30년)가 지난 뒤에야 공개 여부를 검토하게 돼 있다. 게다가 행정안전부 장관 아래 조직이라 역부족일 게 뻔하다.

나는 공죄각이 2013년 서울 세종로 문화체육관광부 청사 터에 개관될 ‘국립대한민국관’ 안에 자리 잡기를 바란다. 자료는 지금부터 모아서 임시 장소에 보관하면 된다. 지난 16일 출범한 대한민국관 건립위원회 위원들도 공죄각 설치 아이디어에 반대하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 대통령을 비롯한 이 나라의 힘센 ‘현직’들이 시간 날 때마다 공죄각에 들러 ‘전직’이 될 때를 대비하는 자세를 가다듬고 돌아가면 좋겠다. 왜 우리 사회는 애꿎은 대검 중수부만 만날 ‘상엿집’ 역할을 해야 하는가.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