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엔 세금 물리고 부동산 팔기 힘들게 … 기부 막는 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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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황필상씨는 2002년 210억원 상당의 회사 주식을 수원 아주대에 기부했다. ㈜수원교차로 대표인 황씨가 거액을 내놓자 아주대는 ‘구원장학재단’을 설립했다. 장학사업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였다. 이사장은 황씨가 맡았다. 그런데 지난해 9월 140억원짜리 세금고지서가 날아들었다. 세무소 측이 공익법인에 대한 주식 기부액이 영리기업 출자총액의 5%를 초과할 때 증여세를 내도록 한 ‘상속세 및 증여세법’을 적용해 기부액의 67%를 증여세로 매긴 것이다. 재단 측은 같은 해 11월 감사원에 재심사를 청구했다. ‘장학사업 증여세 취소’에 뜻을 같이하는 2만여 명의 온라인 서명도 전달했으나 감사원은 6개월째 묵묵부답이다. 그 사이 재단 주식과 부동산은 국세청에 압류됐다. 황씨는 21일 “대기업의 편법 증여를 막기 위해 만든 세법이 기부를 막는 데 사용되고 있다”며 “증여세를 다 물게 되면 장학사업 자체가 불가능해 행정소송을 내겠다”고 말했다.


현실과 동떨어진 세법이 ‘아름다운 장학금 기부자’를 울리고 있다. 사회 기부의 뜻을 살려주지 못하는 세법이 기부자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중앙일보가 전국 2100여 개 장학재단의 운영 현황을 분석한 결과 수십억원의 기금을 가지고도 집행 실적이 미미한 곳이 많았다.

<본지 4월 20일자 1면>,<본지 4월 20일자 31면>

상당수 재단들은 기부를 가로막는 우리나라 세법에 불만을 토로했다. 박태규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장학재단에 기금 모금·운용의 선진기법이 절실하다”며 “기부 활성화를 위해 세법 규정을 비롯한 관련 제도를 먼저 정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구원장학재단처럼 국내 세법은 주식 기부자들에게 불리하게 만들어져 있다. 그 때문에 현 증여세 면제 한도 5%를 미국처럼 20%까지 확대하거나 독일처럼 없애는 방안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부동산 기부도 어렵다. 기부 뜻을 전해와도 법률자문료 부담 때문에 못 받는 곳이 많다. 이해관계자가 얽혀 있거나 매각을 위해 밟아야 할 법적 절차가 까다롭기 때문이다. 2000년 설립해 모금액이 600억원을 넘은 아름다운재단도 기부 부동산은 두 건에 불과하다. 재단의 박소영 기부컨설팅팀장은 “매각 절차를 간소화하거나 법률자문 자원봉사자의 참여를 유도하면 부동산 기부가 증가할 것 같다”고 말했다.

국세청은 공익법인의 투명성 강화가 선행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자신이 낸 돈이 어떻게 쓰일지가 투명해야 기부자가 늘어날 것이라는 논리다. 2007년 개정된 상속세 및 증여세법도 이달 초 발효됐다. 기금 10억원 이상의 공익법인은 인터넷 공시시스템을 통해 재무 상태를 공시하도록 한 것 등이 내용이다. 정작 기부를 유도할 만한 세금 혜택 등 ‘알맹이’는 빠진 것이다.

장학재단 운영도 걸음마 수준이다. 장학재단 인허가권을 가진 교육과학기술부와 교육청은 1년에 한 번 집행금액을 신고받는 것 외에는 손을 놓고 있다. 우양장학재단 정유경 사무국장은 “벤치마킹할 프로그램이 마땅치 않아 답답하다”며 “정부에서 가이드라인이나 정보 교류의 장을 만들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종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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