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깊이 읽기] 전쟁에서 배운다, 나라 지키는 ‘돈의 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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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자유의 대가
로버트 호매츠 지음, 조규정 옮김
미래사, 500쪽, 1만5000원

갑작스런 우환이 생기면 목돈이 필요한 건 개인이나 국가나 마찬가지다. 우선 급한 대로 돈을 융통해 일을 치른 뒤 빚을 갚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기 마련이다. 돈을 빌리려면 신용이 중요하다. 신용을 쌓으려면 평소 가계를 건전하게 꾸려야 한다. 국가도 다르지 않다.

미 무역대표부(USTR) 부대표와 국무부 차관보를 지낸 로버트 호매츠(골드만 삭스 인터내셔널 부회장)가 쓴 이 책의 부제, ‘미국은 어떻게 전비를 마련했는가’에서 알 수 있듯 전쟁이란 국가적 우환을 맞아 미국이 어떻게 자금을 조달하고, 이를 상환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에 관한 방대한 기록이다. ‘돈으로 본 미국의 전쟁사’라고 할 수 있다. 건전한 재정과 신용의 유지가 국가안보, 나아가 자유의 초석이라는 저자의 믿음이 깔려 있다.

예나 지금이나 자금 동원 능력은 전쟁의 필수 조건이다. 미 역사의 출발점이었던 독립전쟁은 이 점에서 아프지만 값진 경험이었다. 전쟁을 선포한 대륙회의에는 징세권이 없었기 때문에 전쟁에 필요한 자금을 제대로 조달할 수 없었다. 구걸하다시피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 끌어온 돈으로 간신히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 때의 비참했던 경험은 독립군 사령관이었던 조지 워싱턴과 그의 젊은 부관 알렉산더 해밀턴에게 신생 미국이 스스로를 지키려면 건전한 재정, 안정적인 정부 신용과 예측가능한 세수(稅收)가 필수적이라는 확신을 심어줬다.


초대 재무장관이 된 해밀턴은 독립전쟁 과정에서 지게 된 부채를 ‘자유의 대가’라고 부르면서 “미 정부의 신용은 이 부채의 성공적 상환에 달려 있다”고 선언했다. 신용 없이 전쟁을 하는 것은 파멸에 이르는 길이라고 그는 확신했다. 그 후 미국은 숱한 전쟁을 치르며 조세, 금융, 통화제도의 혁신을 이뤄냈다. 1861년 남북전쟁 중 소득세가 도입됐고, 달러 지폐를 처음 발행했다. 평화시라면 불가능했을 재정과 세제 개혁에 초당적 합의가 전쟁 덕에 가능했다.

초대 대통령이었던 워싱턴이 퇴임 연설에서 “피할 수 없는 전쟁 때문에 생긴 국가부채는 평화시에 부단히 상환해 우리 세대가 져야할 부담을 부당하게 후손에게 물려줘서는 안 된다”고 역설한 이래 전시부채의 조기상환은 강박증같은 미국의 전통으로 굳어졌다. 1달러와 10달러 짜리 지폐에 초상화로 남아 있는 워싱턴과 해밀턴이 남긴 위대한 유산이었다.

하지만 9·11 테러 이후 그 전통은 깨졌다.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하면서 국방예산과 일반예산을 늘리면서 동시에 대대적 감세를 단행했다. 과거의 전시행정부가 국방예산 확보를 위해 우선순위가 낮은 일반예산을 삭감하고, 세율을 높인 것과 정반대의 길을 택한 것이다.

그 결과는 10조 달러에 이르는 천문학적 국가부채와, 부채의 절반 이상을 대외채무가 차지하는 심각한 상태로 나타났다. 게다가 최악의 금융위기까지 겹쳤으니 저자의 분석대로라면 지금 미국은 심각한 안보 위험에 처해 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전쟁을 피하는 쪽으로 외교노선을 선회하고 있는 숨은 배경일 수 있다.

배명복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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