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윤호의 시장 헤집기] 그냥 내버려 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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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호 35면

“일본의 애니메이션·만화·게임이 세계를 휩쓰는 비결이 뭐요?” 일본의 한 경제기자에게 물었다.

“일본 정부에 그런 걸 담당하는 부서가 없었다는 게 비결이랄까.”
기대를 벗어난 답변이었다. 만약 일본 정부가 이를 전략산업으로 보고 정책적으로 육성하려 했다면, 일본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되레 시들었을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일본은 효율적인 산업정책으로 고도성장을 이룬 나라다. 산업정책이란 게 뭔가. 정부가 경제발전의 청사진을 그린 다음, 그에 맞춰 자원을 배분하면서 일사불란하게 산업을 육성하는 거다. 민간의 창의력이나 시장의 합리성은 별로 중요치 않다. 정부의 완력, 즉 행정규제가 다 알아서 한다. 산업발전의 초기 단계에선 이게 잘 먹힌다. 거액의 투자가 필요한 중화학공업에서 성공사례가 많다.

그렇게 성공을 맛본 공무원들은 착각하기 쉽다. 어떤 산업이든 정부가 나서야 발전할 수 있다고. 그러나 정부가 손을 대서 잘되는 게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특히 민간의 창의력과 시장의 역동성이 중요한 분야는 정부가 너무 끼어들면 활력을 잃기 쉽다. 막강한 자본력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금융업이 힘을 못 쓰는 것도 일본 정부의 과도한 간섭 탓이라고 하지 않나.

일본의 팝 컬처를 기반으로 한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그 반대의 경우로 성공했다고 한다. 똑똑하지만 머리가 딱딱한 공무원들이 관심을 두지 않은 덕분에 애니메이션·만화·게임이 자생적으로 발전했다는 게 일본 기자의 진단이었다.

이와 비슷한 가설은 유럽의 과학기술사에서도 일부 찾아볼 수 있다. 12세기부터 시작된 자석과 자침에 대한 연구는 나중에 지도와 항해술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이어 16세기 영국의 윌리엄 길버트는 지구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자석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는 지구가 단순한 흙 덩어리로 우주의 중심에 정지하고 있다는 고대의 우주관을 깨부수는 데 기여했다.

이 같은 일련의 이론적 발전은 역설적으로 중세 스콜라 학자들의 무관심과 무지 덕분이었다고 한다. 사회 기득권층이던 이들의 간섭이 없었기 때문에 현장의 기술자와 직인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고 연구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권력의 정점이었던 교회가 자석에 대한 개념을 갖고 기존의 제도적 틀 속에서 들여다봤다면, 그 이론 발전은 상당히 늦어졌을 것이라는 얘기다.

이처럼 예나 지금이나 간섭과 육성보다 자유방임이 결과적으론 더 효과적인 경우가 있다. 물론 그런 분야에서도 정부는 뭔가 한 건 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예컨대 싱가포르는 정부 주도의 애니메이션 산업 육성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일본을 따라잡기 위해서란다. 이게 성공한다면 정부 역할론을 다시 써야겠지만, 아직 그럴 가능성이 커 보이진 않는다.

그런 점에서 국내 영화계가 제기하는 정부 지원론은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영화계의 어려움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정부가 나서는 게 실제 얼마나 도움이 될지 확신이 안 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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