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코리아 평화미술전'을 다녀와서…민족 체취 가득한 '감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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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물보다 진한 것은 피지만 피보다 진한 것은 사랑이다."

지난달 28일 '97 코리아 평화미술전' 전야제가 열린 도쿄 메트로폴리탄 호텔 만찬장에서는 어느 때보다 이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일본 미술세계사가 주관하고 코리아 평화미술전 실행위원회 (위원장 가와베 도시오)가 주최한 이 행사는 북한 만수대창작사와 대한민국 미술협회가 공동으로 후원하여 개최하는 남북미술전람회로 금년이 3회째. 평화통일의 염원과 남북미술인의 애틋한 동족애가 담긴, 미술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는 전시회다.

이번 행사에는 나를 비롯해 김흥수.권옥연.변종하.이만익.차일만.김동현.민경갑.민이식.이동식.정승섭.이숙자.이왈종.김수익.신명범.김인화.이중희.장순업.김일해씨와 평론가 신항섭, 그리고 이두식 미협회장등이 함께 했다.

이날 만찬에는 남한 일행이 먼저 자리잡고 앉아 있었다.

곧 이어 북한 일행이 들어와 지정된 자리에 앉았다.

양쪽 모두 긴장된 분위기였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라는 의례적인 인사밖에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앉은 테이블에는 미술세계사 마츠우라 사장, 변종하씨 부부, 조일우호친선협회 상무위원 안창복씨, 만수대창작사 인민예술가 선우영씨, 공로예술가 김동환씨등이 나란히 앉게 되었다.

마츠우라 사장이 북한작가들에게 다음달 열리는 루브르 전시 얘기를 꺼내며 나를 소개하자 북한작가들이 "이미 이화백과 이화백 작품에 대해 알고 있다" 며 자연스럽게 말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이때 북한 화가중 누군가가 평양담배를 꺼내면서 권했다.

반가운 마음에 금연 10년만에 나는 그 담배를 얻어 피웠다.

이것을 보고 있던 변종하씨가 부인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금연 11년만에 평양담배를 기어코 입에 물었다.

이를 지켜보던 인민예술가 선우영씨가 잽싸게 다가가 휠체어 옆에 앉으며 다정하게 담뱃불을 붙여준다.

눈을 지긋이 감고 담배맛을 음미하던 변종하씨가 한참만에 "아!

민족의 냄새가 난다" 며 허공을 응시한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우리는 저도 모르게 모두 휠체어 주변으로 몰렸고 장내엔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이렇게 분위기가 고조되자 단상에 권옥연씨가 자진하여 올라가 성악가 못지않게 '가고파' 를 열창하기에 이른다.

이로써 마음의 문을 활짝 연 남북의 화가들은 격의없는 동포애를 만끽하는 자리가 되어갔다.

다음날 밤 개막식 행사에서 다시 만난 남북의 화가들은 오랜 친구와의 해후처럼 서로 얼싸안고 반길 수 있는 친구가 되었다.

식이 끝날 무렵 이중희씨의 선창에 따라 남북의 화가와 내외 귀빈들이 손에 손을 맞잡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 통일이여 오라…' 를 목이 터져라 부를 때는 곳곳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는 이가 많았다.

훌쩍 떠나가기가 아쉬워 좀처럼 자리를 못뜨는 모습들을 보며 나는 많은 상념에 잠겼다.

"내년에는 남의 나라에서 만나지 말자" 던 북한작가의 마지막 인사말을 되뇌이면서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고 통일을 앞당기는데 작은 힘이나마 보태야 되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이종상 <서울대 교수·한국화가〉<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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