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에로’ 거장의 가족영화 전향선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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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80년대 일본의 저예산 에로영화를 일컫는 ‘로망 포르노’는 걸출한 스타 감독을 여럿 배출했다. 훗날 ‘회로’ ‘밝은 미래’ ‘도플갱어’ ‘절규’ 등으로 세계적 거장의 반열에 오른 구로사와 기요시도 그중 하나다. 83년 로망 포르노 ‘간다가와 음란전쟁’으로 장편 데뷔한 후 폭력과 섹스를 소재로 한 세기말적 작품을 잇따라 선보였다. 인간 내면의 어두운 심리와 현대 일본의 병리현상을 ‘공포’로 풀어낸 사회심리적 호러의 거장, 이른바 ‘J호러’ 시대를 이끈 주역이다.

‘도쿄 소나타’는 그의 첫 가족영화다. 구로사와 호러의 정점으로 꼽히는 2006년 ‘절규’에 이어지는 영화. 호주 각본가 맥스 매닉스의 시나리오를 재해석했다. 이런 장르 전환에 대해 감독은 “지금까지의 경력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부터 새롭게 반영해야 하는 시기라고 느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서정적 제목과 달리 ‘도쿄 소나타’는 도쿄의 평범한 중산층 가정을 무대로 했지만 가족주의의 안온한 판타지 대신 위기로 치닫는 과정을 냉정하게 그렸다. 가장 류헤이(가가와 데루유키)는 하루아침에 실직하고, 아내(고이즈미 교코)는 남모르는 고통을 키워 가며 자식들은 겉돈다. 류헤이의 실직은 값싼 중국 노동자 때문이며, 별 희망 없는 큰아들은 미군에 자원 입대해 전장으로 떠난다. 사회적으로 추락했지만 류헤이는 집안에서 여전히 가부장적 권위를 행사하려 한다. 오직 집밖에 모르고 외부 세계와 단절된 아내는 집에 얼치기 강도(야쿠쇼 고지)가 든 후 폭발한다.

가족 성원의 운명이 사회적 관계에 영향받는다는 점에서 이 가정은 일본 사회의 축소판이라 할 만하다. 물론 감독은 마지막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스스로 “한 줄기 희망의 빛”이라고 지칭한 막내 아들 겐지가 드뷔시의 ‘달빛’을 연주하는 엔딩이다. 피아노 연주에서 암전으로 이르는 이 영화의 엔딩은 최근 본 영화 중 가장 가슴에 남는다. 2008년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심사위원상 수상작.

감독의 한마디=“왜 21세기는 이전 세기에 우리가 기대했던 미래의 비전과 이토록 다른 것일까. 이런 시대에 대한 책임은 대체 누가 져야 하는가. ‘도쿄 소나타’는 이런 복잡한 문제들로부터 고개를 돌리지 않기 위해 창조되었고, 나의 새로운 출발점이 될 것이라 기대한다.”

양성희 기자 shy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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