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독일 좌·우파 원로학자 플라이셔·놀테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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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독일의 좌파와 우파를 대변하는 원로 지식인이 한국에서 우연히 한자리에 앉게 됐다.

지난 1일 방한한 독일의 대표적 좌파 철학자 헬무트 플라이셔교수 (다름슈타트대) 와 지난 6일 입국한 독일 보수주의를 대표하는 역사학자 에른스트 놀테 교수 (베를린대)가 7일 타워호텔에서 만났다.

이 두사람은 80년대말 나치에 대한 평가를 둘러싸고 벌인 '현대사 논쟁' 에서 좌.우파를 대변한 논객들. 이 논쟁은 과거 학살자로서의 '사죄' 를 넘어서 라인강의 기적에 상응하는 국민적 자존심을 살려줄 이데올로기를 요구하는 상황과 맞물려 진행됐다.

86년 여름 '사라지지 않는 과거' 라는 글을 통해 과거를 단순히 사죄의 대상이 아니라 역사의 대상으로 객관화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 놀테 교수에 대해 하버마스가 그해 9월 '차이트' 지에 공격적으로 반박하면서 길고도 지루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한마디로 '도덕화냐 역사화냐' 의 논전이었다.

부모가 나치의 희생자이면서 나치를 연구한 놀테, 소련의 포로였으면서도 마르크스철학을 연구한 플라이셔. 두 사람은 정반대의 정치적 입장을 지니면서도 매우 친한 친구 사이기도 하다.

그러나 논쟁이 자신의 사명인 것처럼 이들은 틈만 있으면 논쟁을 벌였다.

기자는 두 석학을 모시고 '양자 (兩者) 인터뷰' 를 진행하면서 한 질문에 대답은 3분으로 시간을 제한했다.

이 분야의 여러 편의 논문과 단행본을 펴낸 구승회박사 (철학) 의 도움을 받아 진행했다.

- 특히 일본에 비춰본다면 자신의 과거사를 논쟁의 대상으로 삼는 것 자체는 용기있는 일이다.

과거사를 사죄의 대상이 아니라 '역사화' 해야 한다는 의미는.

▶놀테 : 역사에서 선동에 의해 새겨진 '불필요한 감정' 을 제외하자는 것이다.

어떤 전쟁이든 '정서적 적대감' 으로 무장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이같은 강제된 역사인식 없이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접근하자는 것이다.

- 최근 골드하겐처럼 독일인 전체가 '자발적인 사형집행인' 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놀테 : 히틀러에 대한 이미지는 베르사이유 체제에 대항하는 히틀러, 동유럽을 독일인의 생활공간으로 확장한 히틀러, 유태인에 병적 반감을 가진 히틀러 등 다양하다.

그러나 골드하겐이 히틀러를 반유태인주의자로만 규정한 것은 역사인식의 큰 잘못이다.

▶플라이셔 : 아우슈비츠는 나치역사를 포괄하는 핵심이다.

따라서 나치역사의 세분화.차별화는 본질을 흐리는 것이다.

지엽적인 이유를 가지고 명백하고 구체적인 사실을 희석시키려는 태도는 옳지 못하다.

- 역사화한다는 것은 과거를 상대화해 나치역사를 복권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놀테 : 그런 주장은 마르크스주의자나 레닌주의자처럼 역사 속에 어떤 절대적인 것이 있다는 사람들의 생각이다.

역사적 상대화는 역사가의 주요한 과제로 역사적 사실의 '관계지움' 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젠 부정적 의미의 상대화 개념을 청산해야 한다.

▶플라이셔 : 동의할 수 없다.

역사의 상대화는 누가 얼마나 비인간적 만행을 저질렀는가를 수치로 비교하는 것일뿐 올바른 역사인식이라 할 수 없다.

▶놀테 : 그런 말을 하다니 놀랍다.

상대방 입장을 봉쇄하고 오로지 듣기만 하라는 것은 잘못이다.

- 일본 우파들은 식민지 지배를 통해 한국이 근대화됐다고 주장한다.

▶놀테 : 그것은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의 문제다.

하지만 보편적 상식에 따르면 억압과 근대화는 동시적이다.

영국의 인도지배가 단순히 억압.강제만이었다는 주장은 영국이나 인도에서도 수용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합의 가능한 문제라 본다.

▶플라이셔 : 억압.강제가 근대화와 타협가능한 것인가는 회의적이다.

일제시기의 두 측면이 있었다면 억압.강제는 도덕적 평가, 근대화는 사회경제적 설명방식에 따라야 하는 별개의 과정으로 본다.

- 앞으로 일본도 과거사에 대한 성찰이 있으리라 보는가.

▶놀테 : 오랫동안 이뤄져온 독일의 급진적.근본적인 과거사 재평가 작업은 반나치 선동에 근거한 것이었다.

일본인들은 식민지 지배를 미국의 위협에 대응하여 동아시아를 지키기 위한 전쟁이었다는 식의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독일과 같은 철저한 자기반성에 의한 역사화는 불가능하다.

▶플라이셔 : 일본인들은 히로시마 원폭투하를 너무 가혹한 전쟁문책이라 생각하고 있다.

사실 국토의 파괴로 보면 독일은 일본에 비해 상처가 더 큰 것이었다.

그럼에도 독일 지식인은 보수든 진보든 나치의 범죄적 전쟁 그 자체를 부인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일본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 최근 박정희 개발독재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

▶놀테 : 독일에서는 개발독재가 없었다.

한국에서 독재는 부정적이기보다 긍정적 부분이 많았다.

박정희가 아니더라도 한국에는 또다른 형식의 전체주의가 등장했을 것이다.

▶플라이셔 : 내 생각에는 한국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사회문화적 갈등이다.

이런 갈등이 과거를 '좋았던 황금시절' 로 인식하려는 경향으로 나타난다.

바이마르 민주시민들의 나치 선택도 그 예다.

[김창호 학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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