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삼칼럼]'공생'의 길을 찾아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아무리 희망을 갖고 긍정적인 사고를 하려 해도 정치판의 꼬락서니를 보면 한 순간에 비관론자가 되고 만다.

이런 정치를 보자고 그 숱한 희생을 치르며 문민시대를 열었단 말인가.

문민정치 5년의 결과가 끝내 이거란 말인가.

누울 자리나 보고 발을 뻗으랬다고 국내외의 정세가 정쟁 (政爭) 이나 하고 있어도 좋을 만큼 평온하다면 또 모르겠다.

시한폭탄의 초침이 째깍거리고 있는 듯한 기아사태, 무역전쟁이라도 벌어질 것 같은 한.미 무역분쟁, 김정일 (金正日) 의 당총비서 취임 등 긴급하고 중대한 국가적 현안들이 꼬리를 물고 있다.

바로 이런 시점에 명색이 앞으로 5년의 국가경영을 맡겠다는 사람들이 그런 문제들은 안중에도 없이 서로 오물 끼얹기나 하고 있으니 울화가 치밀지 않을 수 없다.

여느 때 같으면 욕이나 하고 돌아앉아 버리면 그만이겠지만 이번 일은 어쩐지 불길하고 예사롭지 않게만 느껴진다.

신한국당의 폭로가 있기 전까지는 집권여당의 후보가 3위를 달리고 제1야당의 후보가 장기간 1위를 놓치지 않는 우리 정치사상 초유의 사태가 전개돼 왔다.

그에 따라 오랫동안 DJ를 지지해 온 유권자들은 이번에만은 그들의 기대가 실현될지 모른다는 믿음을 강하게 키워 왔다.

그런데 그런 모처럼의 기대가 이번 폭로로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된다면? 그래도 그들은 그저 순순히 현실을 받아들일 것인가.

하도 험난한 세월을 지내온 탓인지 걱정이 앞서는 것이다.

국민회의부터가 그냥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YS의 대선자금문제와 이회창 (李會昌) 후보의 경선자금문제를 건드리겠다고 엄포를 놓고 있거니와 전세가 역전 (逆轉) 된다고 느끼게 되면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할 것이다.

앞으로의 선거전이 이런 움직임의 연장선에서 전개된다면 정쟁의 파장은 경제난 심화는 물론 사회혼란으로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미 신한국당이 DJ의 비자금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을 폭로한 마당에 어물어물 넘어갈 수도 없다.

폭로 내용이 사실이라면 액수가 너무 커서 설사 이번에 두루뭉실 넘어간다고 해도 두고두고 말썽의 씨앗이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번 기회에 가릴 것은 가려야 한다.

그러나 이번 문제를 부작용 없이 풀어가는데는 이회창후보의 자제와 김대중 (金大中) 후보의 결단이 함께 요구된다.

지금처럼 제1탄, 제2탄, 제3탄 하는 식의 폭로전은 상대방을 자극해 죽기살기식의 전면전을 부르는 일이다.

이런 식의 선거전은 이회창후보가 궁극적인 승리를 위해 다시 추슬러야 할 과거의 좋은 이미지와도 맞지 않다.

사실 이번에 폭로한 내용만해도 그 사실여부를 떠나 그 수집과 폭로의 수법은 지극히 낯익은 것이었다.

李후보의 인기가 폭락한 것은 정치입문 후 그의 정치행보와 수법이 일반의 기대와는 영 달리 이런 낡은 수법들을 거리낌 없이 채택해 온 데도 있었다.

그런 점에서 李후보는 인기 만회를 위해서라도 이번에는 정치신인다운 새로움과 법관출신다운 합리성을 함께 보여줘야 한다.

그래서 이를테면 수집된 것은 몽땅 폭로하고 보는 식이 아니라 가릴 건 가리고 추릴 것은 추려서 이번 일이 과장과 거짓말의 대결장이 되지 않게 해야 한다.

김대중후보는 지난일을 툭 털어놓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지난 시대에 기업 등으로부터 여야를 막론하고 은밀한 정치자금을 안 받은 사람은 단 한명도 없을 것이다.

또 지난 87년과 92년에 여당후보만은 못했지만 김대중후보 역시 막대한 규모의 정치자금을 썼음은 일반 국민들도 피부로 느껴 온 사실이다.

그렇다면 굳이 발뺌만 하려들 필요는 없을 것이다.

국민들도 지난 날의 정치관행을 익히 알고 있는터라 金후보가 모든 것을 툭 터놓고 밝히면 대체로 양해를 할 것이고 그런 솔직성은 그에게 비판적인 사람들의 부정적인 선입견을 바꿔놓는데도 이바지할 것이다.

김대중.이회창후보가 담판을 통해 해결책을 찾는 것도 한 방법이다.

실은 이 시점에서 과거의 폭로보다 더 요긴한 것은 앞으로는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돈정치가 빚어지지 않도록 선거법과 제도를 바꾸는 일이다.

그를 위해서도 만날 필요가 있다.

두 후보는 공멸 (共滅) 이 아닌 공생 (共生) 의 길을 찾아야 한다.

유승삼 <중앙m&b대표>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