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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경제위기, 우리에겐 기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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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1990년대 중반 혹한으로 하얗게 얼어붙은 모스크바의 버스 창에 성에를 긁어 새긴 자조적 글귀가 언론에 보도돼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개방 이후 러시아 경제가 엉망이던 시절의 생활고를 풍자한 광고성 글귀였다. 물자가 턱없이 부족하고 주머니 사정이 어렵던 이 시절 주민들은 필요한 생필품을 물물교환을 통해 구하곤 했다. 집에 있는 물건을 시장에 들고나가 필요한 것과 맞바꾸기도 했고, 광고지를 보고 교환을 하기도 했다. 2000년대 들어 러시아 경제가 회복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진 듯했던 이 풍습이 요즘 되살아나고 있다.

‘제가 아끼는 중고 자동차를 노트북과 교환합니다’ ‘목재가공소 설비를 자동차와 바꿉니다’…. 러시아 인터넷 사이트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광고들이다. 현지 언론들은 최근 신문과 인터넷에 물물교환 광고가 크게 늘었다고 전한다. 실업과 감봉, 임금 체불 등으로 구매력을 잃은 주민들이 다시 원시적 생존 방식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미국발 금융위기와 유가하락은 러시아 경제에 치명타를 날렸다. 배럴당 150달러까지 치솟던 국제유가가 40달러 아래로 곤두박질치면서 오일달러 위에 세워진 경제가 힘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주가는 지난해 8월 대비 80% 가까이 떨어졌고, 6000억 달러에 육박했던 외환보유액은 3800억 달러대로 줄었다. 실업자도 600만 명을 넘어섰다. 반정부 시위가 늘어나고 한때 차르로 추앙받던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에 대한 비난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지난달엔 분노한 모스크바 여성들이 푸틴 총리를 지지하는 애인이나 남편과는 잠자리를 하지 말자는 의미로 ‘우리는 푸틴주의자들과는 자지 않는다’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지금 우리 코가 석 자인 마당에 한가하게 웬 남의 나라 얘기냐고 할 수도 있겠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굳이 러시아 얘길 꺼낸 건 이 나라의 위기가 우리에게 의외의 기회를 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서다. 러시아가 넘쳐나는 오일달러로 즐거운 비명을 지르던 지난해 중반까지만 해도 우리 기업의 러시아 진출은 버거운 일이었다. 러시아 정부나 국영기업들은 두둑한 주머니 사정을 자랑하며 웬만한 투자 제안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위기가 깊어가는 지금 이들의 태도에도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지난달 중순 푸틴 총리의 오른팔로 에너지 문제를 총괄하는 이고리 세친 부총리가 2박3일 동안 한국을 다녀갔다. 위기의 와중에 느닷없이 에너지장관을 비롯한 주요 경제부처 및 국영기업 총수들을 이끌고 방한한 것이다. 국내 산업시설과 증권거래소까지 둘러본 그는 이명박 대통령과 한승수 총리를 만나 양국의 경제협력에 대해 의미있는 대화를 나눴다. 세친은 특히 무산 위기에 처한 러시아 서(西)캄차카 해상유전 개발사업에 한국이 계속 참여할 수 있을 것이란 언질을 줬다고 한다. 한국석유공사 등이 2004년부터 3500억원의 탐사비용을 들여 추진하던 서캄차카 프로젝트는 한국이 10여 년간의 대러 자원외교에서 건진 유일한 성과였다. 그런데 지난해 8월 러시아 정부가 갑작스레 계약종료를 통보하면서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했었다. 뒤늦게 러측이 다시 한국을 끌어들이려 하는 것은 외국 투자가 그만큼 절실하다는 방증일 수 있다. 방한에 앞서 중국을 찾았던 세친은 중국 정부에 250억 달러의 차관을 요청해 지원 약속을 받았다. 러시아의 다급함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이처럼 러시아의 사정이 어려운 지금이 우리에겐 기회일 수 있다. 지금까지 러시아가 고자세를 보이던 자원개발 프로젝트나 인프라 구축사업 등에 대한 참여 가능성을 적극 타진해야 한다. 물론 우리 정부나 기업도 여력이 없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대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현금만 100조원대에 이른다고 하니 사정이 옴짝달싹 못할 정도는 아닐 것이다. 위기의 탈출구를 찾아 외국으로 눈을 돌리는 것도 한 방법이다.

유철종 국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