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세기를찾아서]30.영국 맨체스터에서 리버풀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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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영국 중서부 지방의 농촌풍경은 평화롭고 아름답습니다. 크고 작은 목장들마다 한가로운 소떼들이 풀을 뜯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평화로운 풍경도 그 속에 아픈 역사를 숨기고 있습니다. ‘양이 사람을 몰아냈던’종획운동(Enclosure movement)이란 이름의 그 비참했던 농민 소탕의 역사를 떠올리게 됩니다. 농토는 하루 아침에 목장으로 변하고 농민들은 맨체스터·리버풀·리즈·요크와 같은 도시로 몰려들었습니다. 산업혁명의 시작이었습니다.

혁명이란 말이 너무 쉽게 남용되고 있지만 아마 17∼18세기의 영국을 중심으로 전개된 산업혁명만큼 급속하고 엄청난 변화는 일찍이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산업혁명은 기계와 동력을 발명하고 생산방법을 변화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인간의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낸 명실상부한 혁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세계를 오늘날의 산업사회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지금은 다시 산업사회 이후의 정보사회에 관한 논의가 무성하지만 정보사회란 아직은 산업사회의 뼈대 위에 올려지는 소프트웨어에 관한 담론인지도 모릅니다.

산업혁명의 본고장이던 이곳 영국 중서부의 소위‘산업혁명 벨트’는 이미 그 역사를 다하고 과거의 고장으로 변해 있습니다. 맨체스터·살포드·셰필드 그리고 리버풀 항구 등 내가 찾아간 곳에서는 과거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습니다.

맨체스터에서 숙소로 든 브리타니아호텔도 1백60년전 이 지역이 산업의 중심지였던 시절에 어느 거상(巨商)의 사저였습니다. 중후하고 고풍스런 인테리어에도 불구하고 건물에서 풍기는 전체적인 분위기는 양로원의 노인을 연상케 하였습니다. 맨체스터는 고도(古都)였습니다. 세계를 혁명적으로 변화시켰던 활력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2백60만의 인구와 대학과 오케스트라와 뮤지엄 그리고 국제적 금융산업도시로 발돋움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세계를 이끌던 폭발력은 사라지고 흡사 박물관 뜰에 놓인 대포처럼 도시의 거리에는 지난 세월로 가득하였습니다. 세계의 공장으로 불리던 이 지역의 남아있는 모습은 과연 역사는 느리기는 하지만 지나고 보면 굉장한 속도로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케 합니다.

당시 방직공장이 있던 앤코트 거리(Ancoat st)도 스산하기 그지없습니다. 1800년대 초반 방직업의 세계적 중심이었던 이곳은 40년 전에 이미 최후의 한사람까지 떠나버린 폐허였습니다. 폐가처럼 을씨년스런 빌딩을 돌아보고 있자니 그 낡은 빌딩의 한 귀퉁이를 빌어 디자인 회사를 하고 있다는 흑인 사무원이 나왔습니다. 그는 그가 보관하고 있는 옛사진들을 보여주며 이 지역이 방직업의 중심지였음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원면(原綿)을 배로 실어 오던 뱃길과 노동자들의 주거지가 있었던 외곽지역을 친절히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 공장들은 모두‘인도로,홍콩으로 갔다’고 하였습니다. 자동차 문을 열어두지 말라는 그의 충고를 듣고 자동차로 돌아가 문을 닫으며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할렘을 연상케 하는 거리와 녹슨 빗장이 채워진 건물 주위에는 군데군데 젊은이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었습니다.

산업혁명 당시 세계 부(富)의 반 이상을 실어 날랐던 리버풀의 풍경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항구 역시 폐항처럼 스산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오늘날은 위스키의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당시 최대의 무역상이던 조니 워커의 무역센터는 이제 워크 갤러리가 되어 있고 바닷가에는 2백여년전 전설적인 선장 제임스 쿡과 함께 대양을 누비던 인데버(Endeaver)호의 앙상한 돛대만 흐린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당신은 리버풀에서 비틀스의 소식을 띄워 달라고 했습니다만 이곳 비틀스의 고향에도 비틀스는 없었습니다. 나는 비틀스가 상품화되기 이전에 노래불렀던‘캐번클럽’과 비틀스의 일생을 재현해 놓은‘비틀스 스토리’를 찾아갔습니다. 아직도 비틀스를 잊지 않은 젊은이들이 좁은 지하공간을 메우고 있었습니다. 비틀스의 노래는 산업노동의 삶과 리듬이 만들어낸 음악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동시대의 수많은 젊은이들의 가슴 위로 상륙했던 그들의 생명력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어떠한 사상이나 이념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은 이유는 과연 무엇이며 무엇이 수많은 젊은이들을 그토록 열광케 하였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노동계급의 아들인 4명의 젊은 비틀스는 분명 동시대의 젊은이들이 스스로도 미처 발견하지 못하던 것을 일깨웠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은 비틀스 자신들도 미처 깨닫지도 예상하지도 못하였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은 좁은 지하공간의 영상 속에서만 외치고 있을 뿐입니다. 비틀스 스토리에서 읽게 되는 것 역시 지나간 날(Yester- day)의 이야기입니다.

당신은 비틀스가 결국 해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폴 매카트니와 존 레넌의 차이와 결별로써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결별은 비틀스를 둘러싸고 있는 두개의 외압(外壓),즉 상업성과 정치성이라는 강제력이 비틀스 속에 내화(內化)한 것이며 결국 비틀스는 이 두 억압의 합작에 의하여 종언을 고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안타까운 것은 그러한 차이와 외압 이전에 이제는 비틀스의 자양이 되었던 생산현장이 황무지처럼 메말라 있다는 사실입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비틀스가 함께 손잡고(Hold hand) 노래할 청중마저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입니다.

‘렛잇비(Let it be)’를‘만들어 내자’는 창조의 의미로 노래했는지 아니면 그것을‘내버려두라’는 방관의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알 수 없지만 나는 노래를 부르고 노래를 공감하는 정서 그 자체의 철저한 변질이 더욱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제는 현실의 존재성에 대해서마저도 생각하기를 포기한 관중이 있을 뿐입니다.

나는 산업혁명의 고장 그리고 비틀스의 고향에서 새삼스레 삶(생산)과 노래(정서)에 관해 생각하게 됩니다. 한 나라가 만들어내는 부(富)는 과연 얼마만한 크기이어야 하는가. 결코 폐허가 되어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지지 않을 수 있는 도시의 규모는 과연 얼마만한 크기이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공룡이 사멸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몸집의 크기에 관한 연구와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 노래는 우리에게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노래는 역시 노래라는 당신의 말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노래가 아무리 노래라 하더라도 그것이 정서의 공감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라면 그러한 정서는 저마다의 삶을 가슴으로 상대하는 정직함에서부터 길어올려야 옳다고 믿습니다. 파도를 이기는 방법은 가슴으로 파도를 계속 넘는 방법 이외에는 없습니다. 그리하여 도달하는 대안(對岸)이 대안(代案)일 것입니다. 지향없는 몽환(夢幻)의 노래가 부질없는 까닭을 생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맨체스터와 리버풀을 떠나오면서 나는 참으로 먼 곳을 다녀오는 느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결코 지나간 날을 돌이켜보는 고도(古都)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재를 읽어내고 다시 미래를 바라보는 훌륭한 조망대(眺望臺)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틀스가 사라진 이유(Why she had to go)를 생각하고 하늘을 향하여 키워 온 그들의 꿈(Above us only sky)을 바라보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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