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적 장르, 막장 드라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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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호 07면

‘아내의 유혹’은 이른바 ‘막장 드라마’에 대한 시청자들의 학습 효과에 기대고 있다. 수년간 욕을 먹으면서도 최고의 시청률을 올리며 어느덧 친숙해진 막장 드라마의 코드와 기법들이 총동원된다. 클리셰가 된 기표들을 불러내는 방식 역시 거침이 없다. 애써 홈드라마의 외피를 쓰거나 ‘현실적’이고자 하던 약간의 노력마저 과감히 삭제해버렸다. 새삼 눈치볼 필요가 뭐 있느냐는 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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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회부터 주인공이 남편 때문에 바다에 빠져 죽는 설정이다. 이어 복수에 필요한 상황과 캐릭터를 초반부에 간단하게 설명한 뒤, 곧장 무시무시한 원한과 대결의 제2막이 펼쳐진다.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다. 에둘러 가며 시청자들의 진을 빼는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익숙할 대로 익숙하므로. 애초에 그들이 원했던, 저 깊숙한 곳의 욕망만이 치열하게 분투를 벌이는 곳으로 재빨리 데려다 놓는다.

이건 이른바 ‘막드(막장 드라마)’가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았음을 의미한다. 만드는 사람과 보는 사람 간의 약속과 코드는 정해져 있다. 간단한 선악 구도와 폭력적인 가족 관계, 출생의 비밀 혹은 복수를 놓고 긴장을 자아내는 서스펜스 기법 등이 이 장르의 언어다. 주인공 역시 이 장르의 히트작 ‘인어 아가씨’로 스타가 된 장서희와 아침 드라마에서 내공을 쌓은 변우민이다. ‘아내의 유혹’은 이어지는 사건의 연속과 복수를 위해 기능적으로 배치된 배역들만이 있을 뿐 그들의 캐릭터에 대한 배려 같은 건 안중에도 없다.

그렇지만 시청자들은 이미 전작들에서 학습해온 장서희와 변우민의 이미지들을 불러와 그 캐릭터들에 대한 기억으로 이 드라마 속 캐릭터의 빈곤함을 보충한다. 장르의 힘이다. 롤러코스터처럼 빠르게 전개되는 드라마는 매번 새로 등장하는 아이템들로 보는 사람들이 쉴 틈을 주지 않는다. 마치 작가가 기존의 ‘막드’들을 패러디하는 것이 목표였을까 싶을 정도로 총동원된 아이템들은 뻔뻔하게 재연된다.

그런데 이렇게 ‘작정하고 달려드는’ 막드는 인터넷 세대의 호응을 얻고 있다. 극단의 설정과 개연성 없는 스토리텔링, 반복되는 이야기에 비해 지나치게 진지하게 열연을 펼치는 연기자들의 온도 차가 패러디의 욕구를 자극하고 묘한 컬트 현상을 불러일으킨다. 장르의 성장과 발전이다.

그러나 한때 영화계를 휩쓸다가 최근 소멸을 고한 ‘조폭코미디’라는 하위 장르처럼, 이 빈곤한 장르의 득세는 상상력과 창의력이라는 말조차 사치 같아 보이는 오늘날 한국인의 괴이한 문화 생활만을 쓸쓸하게 비춰줄 뿐이다. 똑같은 불륜과 배신 같은 것을 다루더라도 가부장제와 남자들, 그리고 그것의 굴레를 넘어서려는 여자들에 대한 통렬하고도 서늘한 통찰을 남긴 김수현의 드라마 같은 것과 비교해보자.

시댁의 가족에서 엄청난 희생을 하고도 결국 거기에서 탈락된 장서희의 복수는 또 다른 여자를 그 가족에서 탈락시키기 위해 대결을 벌이는 것이다. 일껏 쌓아 온 여성의 발전적인 이미지들을 수십 년 전의 지위로 돌려놔 버리는 이 명백한 퇴행과 기행의 드라마를 골든 타임에 온 가족이 모여서 보며 열광하는 한국인의 저녁 풍경을 생각해보라. 드라마는 삶의 모사이며 동시에 삶을 잊게 해주는 것이라면, 드라마를 통해 보이는 우리의 삶이 너무나 곤궁해 보인다.


이윤정씨는 일간지 문화부 기자 출신으로 문화를 꼭꼭 씹어 쉬운 글로 풀어내는 재주꾼입니다. filmpoo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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