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정진홍의 소프트파워

즐겁고 유쾌하게 나이 드는 법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2면

# 세계적인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가 얼마 전 내한공연을 했다. 그는 1941년생으로 올해 68세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살아있고 그의 열정은 여느 젊은이 못지않다. 아마도 거기엔 그의 좌우명이 한몫했으리라. “쉬면 녹슨다 ! (If I rest, I rust !)”

 # 도밍고는 매일 아침 깨어날 때마다 오늘도 노래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아울러 사람들이 내 음악을 사랑해 주고, 내 목소리를 기다리는 청중이 있는 한, 그리고 내가 무대 위에서 노래하는 걸 즐기는 한 계속 활동할 것이라고 말한다. 도밍고는 데뷔 후 지금까지 모두 126개의 오페라 배역을 소화해 냈다. 그는 올 시즌 동안 적어도 두 개 이상의 새 배역을 맡을 예정이다. 물론 그도 나이 드는 것을 피할 순 없다. 하지만 그는 결코 스스로를 녹슬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것이 그가 즐겁게 나이 드는 법이다.

# 애니메이션계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는 1978년 ‘미래 소년 코난’을 세상에 내놓은 이래 지난 30여 년 동안 상상의 바다 깊은 곳에서 동심을 퍼올리듯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왔다. 특히 2001년에 만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아카데미상 애니메이션 부문과 베를린 영화제 금곰상을 수상했다. 또 지난해 선보인 그의 최신작 ‘벼랑 위의 포뇨’는 과연 이것이 일흔을 앞둔 노인의 머릿속에서 튀어나온 것일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다. ‘68세 소년’ 미야자키 하야오는 시침 뚝 떼고 온전히 아이들의, 그것도 다섯 살짜리 꼬마 소스케의 상상 속에서나 가능할 수 있는 시선으로 무려 17만 장의 셀화를 우리 앞에 펼쳐 놓았다. 그런 그에게 나이란 말 그대로 숫자에 불과할 뿐이다.

# 전 세계적으로 연간 3조원이 넘는 매출을 올리는 ‘글로벌 패션 왕국’의 제왕 조르조 아르마니는 1934년생으로 올해 일흔다섯 살이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현역일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25년을 더 일하면서 자신의 패션 감각을 우리 삶의 모든 영역으로 확대하는 일에 자신의 남은 인생을 걸겠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100살까지 일하겠다는 의지다. 하지만 그는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그는 “나는 매번 1cm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도전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꿈꾼다. 사람들이 아르마니 카페에서 아침을 먹고, 아르마니 옷과 선글라스, 아르마니 시계 차림으로 출근해 아르마니 휴대전화로 통화하고, 집에 와서는 아르마니 침대에서 자며, 아르마니 TV를 보고, 아르마니 호텔과 리조트에서 휴가를 보낼 수 있는 것을. 그 꿈은 이미 현실이 되고 있다. 그 꿈이 그를 즐겁게 나이 들게 만드는 것인지 모른다.

# 우리나라 방송 역사상 최장수 방송 프로그램인 KBS ‘전국 노래자랑’을 26년째 이끌고 있는 국민MC 송해씨는 1927년생으로 올해 나이 여든두 살이다. 그는 80세가 넘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지금도 놀라운 현역임을 과시하고 있다. 그는 전국 노래자랑 녹화 전날엔 현지로 내려가 그 지역의 음식을 먹고 목욕탕에 찾아가 사람들과 진솔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런 경험이 녹화 때 고스란히 반영됨은 물론이다. 그는 그 현장감 때문에 즐겁고 유쾌하게 나이를 먹는다. 그런 송해씨는 요즘의 세태에 대해 이렇게 일침을 놓는다. “바닥부터 제대로 배우고 익혀야 할 텐데 다들 너무 급해요. 하루아침에 이루려 하고, 번쩍 하면 스타가 되는 것으로 착각해요. 그 계산서가 나중에 다 온다는 걸 모르고 말이에요.” 진짜 새해 벽두에 우리 모두가 곱씹어봐야 할 대목이 아닐까 싶다.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