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 정확하고 바른 문장이 세상을 바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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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봄의 예비선거(primary) 때부터 나는 미국의 대통령 선거를 맹렬히 지켜보았다. 잘 때만 빼놓고 미국 대선에 ‘올인’해 하루 종일 CNN을 틀어놓고 내 볼일을 보았다. 아침이면 인터넷에 들어가 뉴욕 타임스를 훑고, 저녁밥상을 차리며 7시에 시작하는 ‘래리 킹 라이브’를 시청하는 게 일과였다.

힐러리를 누른 아이오와의 민주당 경선에서부터 공화당 부통령 후보 페일린의 깜짝 등장에 이르기까지 이번 미국 대선은 최고의 리얼리티 드라마였다. 내가 아는 어떤 소설보다 흥미진진한 선거운동을 따라가며, 영어도 배우고 미국 사회를-대학 시절의 선입견을 버리고 온전하게-이해하는 즐거움도 덤으로 얻었으니, 바보상자 앞에서 보낸 1년이 아깝지 않다.

정치가 이렇게 재미있을 수 있다니. 정치가의 얼굴도 저렇게 깨끗할 수 있구나. 오바마를 지켜보며 나는 정치도 얼마든지 아름다울 수 있음을 알았다. 이 특별한 역사의 현장을 따라가며, 정치에 대한 나의 오랜 냉소주의를 떨칠 수 있었다. 선거 날이 다가오며 혹시나 걱정이 돼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드디어 11월 4일 당선 확정 소식을 듣고 이제 끝났구나, 맺힌 매듭이 풀리 듯 눈물이 흘렀다. 울다 웃다 소리 지르며, 혼자만 간직하기 벅찬 기쁨을 나누고자 전화기를 붙들고 e-메일을 보내느라 난리를 떨었다. 그때 내 곁에 누가 있었다면 끌어안고 춤이라도 추련만. 대한민국 하고도 강원도 춘천에 뚝 떨어져 산다는 게 억울했다.

그의 승리에 대해 수많은 매체에서 엄청난 말을 쏟아냈으니, 나는 한마디만 보태련다. 여기 (희한하게도) 골프를 즐기지 않는 대통령, 시집과 소설을 읽는 깡마른 대통령이 탄생했다고. 골프채를 휘두르는 배불뚝이 권력자의 사진을 보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나는 감동했다.

교양 없고 계산만 잘하는 상스러운 무리들에게 한 방 먹인 셈이니. 축구경기를 분석할 능력도 없으면서 지식인 행세하는 조선의 먹물들, 지하 밀실에서 폭탄주를 돌리며 거드름을 피우는 조선의 수컷들과는 사뭇 딴판인 맑은 얼굴. 어디서 이렇게 멋진 녀석이 나왔을까? 다음날 아침 그에 대해 더 알고 싶어 부리나케 서점으로 달려갔다.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을 사서 밤을 새우며 정말 오랜만에 책 읽는 재미에 푹 빠져 내 속의 우울을 떨쳐버렸다.

며칠 뒤 서울에 가서 오바마의 얼굴이 큼지막하게 나온 시사주간지 타임을 사고, 두 번째 자서전인 『The Audacity of Hope』의 영어판을 구해 오늘까지 야금야금 사전을 찾아가며 읽고 있다. 뒤 표지에 실린 뉴욕 타임스의 촌평부터 마음에 들었다. “Barack Obama is that rare politician who can actually write -and write movingly and genuinely about himself.” (버락 오바마는 정말로 글을 쓸 줄 아는, 자기 자신에 대해 감동적이며 진솔한 글을 쓰는 아주 드문 정치인이다.)

첫 번째 책만큼 흥미롭지는 않으나 예술가 뺨치는 탁월한 문장에 나는 탄복했다. 한편의 잘 짜인 시처럼 언어가 가진 본래의 운율을 살리고 정확히 제 있을 곳에 들어간 단어들은, 때로 더듬거리지만 진심에서 우러나온 그의 연설처럼 대중을 사로잡는다. 그는 단지 말하는 기술만 뛰어난 정치인이 아니다. 그를 지켜보노라면 그가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따뜻한 가슴과 예리한 지성을 갖춘, 정말 희귀하게 훌륭한 인간임을 누구든 알아채리라. 오늘날 위기에 처한 지구를 구할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로 버락 오바마다. 그래서 미국뿐 아니라 세계의 깨어 있는 선량한 시민들이 마치 구세주가 재림한 모습을 보듯이 그에게 열광했던 것이다.

정확하며 옳은 문장은 세상을 바꾸는 힘이 있음을 증명한 오바마. 어쩜, 그는 대통령이 되지 않았더라면 뛰어난 작가가 되었으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의 승리는 문학의 승리이며, 양심의 승리이다. 그를 읽으며 나는 다시 나를 믿고 싶었고, 글쓰기를 통해 다시 세상에 나를 내던지고 싶었다. 며칠 뒤로 다가온 취임식을 기다리며 내 아파트의 모든 달력에, 1월 20일에 동그라미를 쳐놓고 나는 기도한다. 제발 무사히 행사가 끝나기를. 링컨이나 케네디처럼 암살당하거나 어디 다치지 않기를 간절히 빈다. 우리의 희망을 어둠의 세력들로부터 하느님이 지켜 주시기를….

최영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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