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혁칼럼>위기의 선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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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시한폭탄의 초침이 찰칵찰칵 돌아가는 것과도 같은 깊은 위기감이 감돌고 있다.영화에서 보면 브루스 윌리스가 목숨을 걸고 폭탄의 붉은 전선을 절단함으로써 위기는 해소되지만 우리가 맞고 있는 오늘의 시국위기는 해소할 방안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영화보다 훨씬 더 절망적이다.

한보와 김현철(金賢哲)사건은 이제 곧 정점(頂點)에 도달할 것같다.미국에 있던 金씨의 측근 이성호(李晟豪)씨가 귀국해 조사받음으로써 金씨의 구속은 임박한 것으로 보인다.그에겐 얼마인진 모르나 거액의 남은 대선자금과 비자금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 사실인 것같다.또 돈을 감추고 만드는 과정에서 가명.차명.돈세탁 따위의 온갖 누추한 일들이 있었던 것도 확실해 보인다.

YS로서는 측근과 직계의 부패.치부에 이어 아들의 부패.치부까지 드러났으니 대통령으로서의 권위는 물론 한 인간으로서의 체면까지 잃고 말았다.더욱 상황이 나쁜 것은 대선자금문제다.한보로부터 6백억원인지 9백억원인지 대선자금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그 자신 한보의혹의'몸통'이 아니냐는 직격탄이 날아들고 있다.비록 9백억원이나 6백억원은 아닐지 모르나 액수가 얼마든 한보로부터 대선자금을 받았으리라는 의혹은 검찰의 공식부인과는 상관없이 국민가슴속에서 지우기 어렵게 됐다.지금껏 YS의 도덕성은 비록 정치풍토와 관행 때문에 음성적 정치자금을 조달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그 돈을 정치에 썼지 개인적 치부를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그러나 이번에는 그것마저 무너지려 하고 있다.아들이 감춘 남은 대선자금과 세탁해 숨겨둔 비자금을 이제와서 자기는 모르고 있었다고 한들 국민이 이해해 줄지는 의심스럽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길은 무엇인가.더 이상 대통령으로서의 권위도 잃었고,국정통제력도 상실했으니 그만 물러나야 할 것인가.아니면 국가와 국민,헌정에 대해 갖는 대통령의 무거운 책임을 중시해 남은 9개월을 버텨야 할 것인가. 이 선택의 문제는 YS만의 문제가 아니다.정치권과 국민 모두가 당면한 문제다.

어떤 이는 하루라도 빨리 이런 표류의 기간을 단축해 대선을 앞당기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잘못이 있으면 책임을 지고 죄가 있으면 벌을 받는 것이 법과

정의를 살리는 길이라고 한다.그러나 어떤 이는 임기를 다 마쳐야 한다고

말한다.재임중의 대통령이 의혹 또는 혐의로 임기를 채우지 못하는 전례를

남기는 것은 앞으로 누가 대통령이 되든 돌발적인 양심선언이나

폭로.비밀녹음으로 자리가 흔들리게 되는 만성적 헌정불안요인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야당은 대선자금을 자진 공개하고 사과하라는 선까지만 요구하면서 하야나

헌정변칙사태는 원하지 않는다고 하고 있다.또 야당은 YS가 신한국당을

탈당하고 거국중립내각을 구성하라고 요구하거나 혹은 내각제를 하자고

제의하고 있다.

그러나 야당의 논리는 다분히 이율배반적이다.대선자금을 공개하고

한보'몸통'임을 시인하라고 압박하는 것은 곧 하야하라는 말과

마찬가지다.그런 지경에까지 몰리면서 YS가 대통령직에 머물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그러나 야당은 하야는 원치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또

거국내각이나 내각제가 대선자금이나 한보의혹의 해법(解法)이 될 수도

없다.내각제를 합의한다고 의혹이 풀리는 것도,없어지는 것도

아니다.거국내각을 한다고 의혹이 해소되지도 않는다.그렇다면 야당의 이런

주장은 궁지에 몰린 YS를 핍박해 정치적 이득을 보려는 정략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결국 야당도 아직껏 선택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 필자 역시 지금껏 이 선택을 강요받고 싶지 않았다.정답을

모르기 때문이다.그러나 이제 누구라도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온것 같다.필자의 생각으로는 의혹규명과 헌정유지를 이 시기의

양자택일의 문제로 몰아가지 말고 선후(先後)의 문제로 처리할 수는 없겠느냐

하는 것이다.먼저 참회고백의 통과의례를 거친후 헌정유지를 해나가면서

YS에 관한 의혹규명을 9개월뒤로 연기하자는 것이다.여야 대선후보들이 이

문제에 관해 각기 공약을 내걸고,집권한 새정부가 국민의 뜻에 따라

의혹부분을 처리케 하면 어떨까.그 처리방법이 全.盧씨를 처벌한 YS방식이

될지,진실을 밝히되 화합하는 만델라방식이 될지는 국민선택의 몫이다.만일

국민과 야당이 이런 선후처리방법에 동의한다면 대선정국을 관리할

거국내각이나 돈정치 혁파를 위한 제도개혁등을 초점으로 한

정치복원(復元)의 새국면이 열릴 수도 있을 것이다. 송진혁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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