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포커스>황장엽의 폭탄발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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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루돌프 헤스는 히틀러와 괴링 다음가는 나치독일의 3인자였다.그는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기 직전인 1941년 5월10일 홀로 전투기를 몰고 영국으로 날아갔다.목적은 영국과의 평화협상.독일이 소련과 동유럽을 세력권으로 장악하는데 영국이 동의하면 독일은 대영제국을 도발하지 않겠다는 것이 헤스의 화평조건이었다.

그러나 처칠의 영국정부는 그를 체포했다.그는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베를린의 스판다우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87년 92세의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끊었다.헤스의 기행(奇行)으로 위신에 치명상을 입은 히틀러의 나치독일은 그를 정신병자로 몰았다.

北은 핵무기를 가졌나 영국신문 파이낸셜 타임스는 황장엽(黃長燁)의 망명을 헤스의 수수께끼같은 행동에 비유했다.헤스의 경우처럼 황장엽도'북한의 도발에 의한 전쟁 재발을 막기 위해'70이 넘은 고령을 무릅쓰고 가족과 동지들을 버리고 앞날이 불투명한 제2의 인생을 선택했다.

헤스가 영국과의 직접협상을 시도했다면 황장엽은 북한의 전쟁준비에 대한 경각심과 한국의 대응조치 촉구를 통해 전쟁을 방지하는 방법을 쓰려는 것 같다.그의 발언중에서 가장 충격적이고 주목을 끄는 것은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대목이다.

그는 96년 8월 북한에서 썼다는 '조선문제'라는 논문에서 북한이 핵무기와 화학무기.미사일로 남한을 공격해 남한을 불바다로 만들고 초토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북한이 화학무기와 미사일을 갖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그러나 북한이 핵무기까지 갖고 있다는 주장은 추측과 우려의 수준을 넘지 않았다.

북한이 핵폭탄 한두개를 만들 수 있는 플루토늄을 갖고 있다고 의심받은 것은 94년 10월 북한과 미국이 제네바에서 핵합의(核合意)에 서명하기 이전까지의 일이다.제네바합의로 북한은 경수로 2기를 제공받고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대신 핵무기개발계획을 완전히 백지화한 것으로 돼 있다.

그의 주장대로 북한이 핵무기를 가졌다면 제네바합의는 순식간에 와해되고 한국과 미국의 대북정책과 전략은 대전제(大前提)부터 바뀌어야 한다.그러나 미국정부는 황장엽의 주장을 신뢰하지 않는 입장이다.뉴욕타임스가 전하는 미국의 전문가들은 그의 논문이 북한이 갖고 있다는 핵무기의 숫자.성능과 미사일의 사정거리등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황장엽은 진위(眞僞)가 아직 검증되지 않은 문제의 논문 앞부분에서 북한이 핵무기를 이미 갖고 있는 것으로 표현하고 중간부분에서는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표현을 썼다.북한이 핵무기를 갖고 있다는 것인가,아니면 지금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것인가.어느 쪽이라도 문제다.

그는 핵무기의 생산과 보유를 포함해 북한의 민감한 군사기밀을 알 수 있는 입장에 있었는가.북한이 핵무기를 갖고 있는데 미국은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는가.그는 96년 8월 평양에 있으면서 그런 글을 쓸 수 있었는가.황장엽이 지금은 서울에 있다.정부는 서둘러 이런 의문들을 풀어야 한다.

미국은 신뢰 않는 반응 황장엽은 북한이 준비하는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한국은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일에 앞서 치안과 공안체제를 강화할 것을 촉구했다.그의 권고는 냉전적인 처방이다.물론 그런 처방이 마음에 안든다고 일축할 일은 아니다.그의 말을 믿지 않는 미국정부의 입장이 마음에 든다고 그쪽 말을 무조건 믿을 일도 아니다.

황장엽은 지금 자신의 일생을 부정(否定:Negate)하는 고뇌에 찬 입장에 있다.그의'늑대소년'의 외침이 망명객에게서 일반적으로 예상되는 북한 죽이기의 발언인가,아니면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객관적인 사실을 담고 있는가.이것을 가리는 것이 황장엽처리에서 정부의 최우선과제다.경제불황과 한보사태에 지친 민심은 안보와 관련된 더이상의 자극을 사양한다. 김영희 (국제문제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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