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세계 통화 전쟁 … 동북아 공조가 해법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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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한 나라의 경제가 흔들릴 경우 그 나라 통화의 위상이 추락하는 것은 불가피한 현상이다. 지금 미국의 달러화가 그렇다. 미국의 거대한 무역·재정 적자에다 제로금리까지 가세하면서 달러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세계 각국의 외환보유액에서 달러 비중이 눈에 띄게 줄어들고, 국제 채권시장에선 유로 표시 채권이 달러 표시 채권을 압도하고 있다. 보다 안전한 통화로 몰리는 것이 돈의 생리다. 낮은 이자율에다 환차손까지 각오하면서 국제자금이 달러에 계속 쏠리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이런 흐름이라면 세계 통화 전쟁은 피할 길이 없다.

물론 달러 위상이 하루아침에 붕괴하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달러화 패권에 대한 도전은 점점 거세지고 있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달러는 더 이상 유일한 기축통화가 아니다”며 유로화를 포함한 다극체제로의 전환을 주문했다. 이런 자신감은 통화가치가 크게 높아진 유로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달러 패권에 가장 위협적인 나라는 중국이다. 중국은 2조 달러의 외환보유액을 무기 삼아 “우리가 미 정부 채권을 계속 매입할 것으로 기대하지 말라”며 압박하고 있다. 중국은 또 홍콩·마카오는 물론 동남아국가연합 10개국과의 교역에서 위안화 거래를 처음 허용했다. 위안화의 국제화에 시동을 거는 의미있는 조치다. 일본 역시 손 놓고 있지는 않다. 다만 미·일동맹을 의식해 공개적인 움직임을 자제하고 있을 뿐이다. 엔화 공영권은 일본의 오랜 꿈이다.

세계 통화 전쟁이 치열해질 경우 한국에도 불똥이 튈 수 있다. 달러 약세는 국제 원자재 가격을 자극해 또다시 하이퍼(超) 인플레이션을 몰고 올지 모른다. 기축통화가 흔들리는 것에 대비해 외환보유액과 결제 통화를 다양하게 분산시킬 필요도 있다. 그래야 원화 가치의 안정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세계 주요 통화의 각축전은 한국에 새로운 기회이기도 하다. 우리가 미국·중국·일본과 통화 스와프에 연이어 성공한 것도 이들 세 나라의 신경전에 따른 반사이익이란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기축통화가 바뀌면 세계 경제의 지형도가 근본적으로 변하게 된다. 이에 대비해 한·중·일의 동북아 연대에 각별히 신경 써야 한다. 지금으로선 가장 효과적인 해법이다. 3국 통화 스와프 한도를 미리 넉넉하게 확보해 두고, 아시아통화기금(AMF) 창설에도 속도를 내야 할 것이다. 물론 가장 중요한 방어막은 내부의 면역체계다. 강력한 제조업과 튼튼한 금융시스템이야말로 세계 금융의 쓰나미에서 우리의 생존을 도모하는 최고의 방파제라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