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인터뷰>강경식 부총리겸 재정경제원장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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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논란을 거듭하던 실명제 보완문제를 취임 직후에 해치워버린 강경식(姜慶植.61)부총리겸 재정경제원장관.약속된 시각에 과천청사 집무실에 들어서자“아이구 미안합니다.잠깐만요”라며 꾸부정하게 선채로 하던 일을 계속했다.자신의 스피치 원고

를 일일이 고치던 참이었다.무엇이 마음에 안들어서였을까.

-써주는대로 읽지 않고,무얼 그렇게 고치십니까.정력이 너무 왕성하신 것 아닙니까.

“아직은 사이클이 안맞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지요.시간이 좀 지나면 내 생각을 알테니까 손댈 필요가 없겠지요.”

82년 재무장관으로 한창 힘을 쓸때 붙여진 별명은 그의 이름과 같은 발음인'强硬式'.소신이 분명하고 고집이 셌다는 뜻이다.그런 그가 실무자가 써온 원고를 그냥 읽을리 없다.

-오랫동안 정치생활을 하다 컴백하셨는데 어색한 점은 없습니까.

“13년여만에 돌아왔지요.취임한지 얼마 안돼 아직 뭐가 달라졌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리 어색하지는 않아요.다만 재무부와 경제기획원을 합쳐놓으니 일이 너무 많아요.솔직히 따로 생각할 시간이 없습니다.차안에 있을 때가 유일한 짬인데 노트

북컴퓨터를 갖고 다니다 생각날 때마다 메모하고 있습니다.”

공무원들 사고의 폭 넓혀야

-밖에 나가있는 동안 정부를 비판하는 이야기도 많이 하셨는데,들어와서 보니까 어떻던가요.

“공직생활은 유연한 사고가 필요한데 너무 일에 치여있다는 걸 느꼈습니다.자기 분야 외의 것을 접하면서 사고의 폭을 넓혀야 하는데 공무원들이 너무 바빠요.그러니 자연 고정된 틀에 얽매이게 되지요.저같은 경우는 잡독(雜讀)을 해왔지요.

과학잡지로부터 시작해 중국 무협소설도 즐겨 읽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무얼 물어도 막히는 게 없다.더구나 정부를 떠나 더욱

다양한 경험을 쌓고 시종일관 원론과 현실사이를 넘나든 탓인지,질문을

던지기가 무섭게 척척박사처럼 소신을 피력해 나갔다.

-개각발표가 나던 날 의원회관 첫 기자회견에서부터 한꺼번에 소신을

쏟아내는 바람에 오히려 기자들이 어리둥절했다고 하던데요.

“묻는대로 대답을 하다가 곤욕을 치렀습니다.금융실명제 이야기만 해도

지난달에 월간지를 통해 말했던 것이어서 거리낄 게 없다고

여겼습니다.더구나 임명권자가 나를 부총리로 뽑았을 때는 저

친구(姜부총리)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를 이미 감

안했으리라는 생각도 했었고요.그러나 대통령께 사전보고를

했어야지요.”

-금융실명제를 사전에 상의하지 않았다고 대통령한테 야단맞았다고

하던데,사실입니까.

“(껄껄껄 웃으면서)금융실명제는 현 정권의 최대 치적입니다.최대

치적을 바꾸자는데 사전 조율이 없었다면 누구라도 가만있기는 어려운

일 아니겠습니까.대통령을 독대한 다음날 신문을 보니 금융실명제

보완이 백지화됐다고 나오기에 모양도 옙육?해서 앞당겨 보완대책을

발표했지요.하지만 앞으로도 국회 통과등 산 넘어 산입니다.”

公私 혼동해 많은 문제 발생

-현직 국회의원이기도 하지만 장관도 광의의 정치인 아닌가요.정치와

경제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겁니까.

“정치판에선 내가 국회의원인데도 정치인으로 안여깁디다.한국의

정치는 정말 문제예요.정치가 뭡니까.사회의 크고 작은 문제를 수렴해

해결하는 것 아닙니까.우리 현실은 정반대입니다.문제의 해결보다

도리어 갈등을 조장하고 문제를 확대시키고

있지 않습니까.흔히 정치를 4류로 비하시키는 말도 나옵니다만,정치가

4류인데 어떻게 경제 혼자서 1류가 될 수 있습니까.상대적으로 경제가

정치보다 다소 낫다는 정도겠지요.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경제가 4류의

정치수준에 맞춰 하향평준

화된 셈이라고나 할까요.87년'6.29선언'이후 정치논리가 경제를

압도하다보니 고비용.저효율 구조로 가면서 경제가

하향평준화됐지요.기업가들은 요새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말을

많이 하더군요.”

-우리 현실은 행정부가 정치까지 하고 있지 않습니까.정부의 역할이

어떻게 돼야 하는 겁니까.

“행정부가 정치를 담당하는 것은 잘못입니다.지금은 행정부에 권한이

너무 집중돼 있는 반면 정치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국회의원이

제몫을 했다면 노동법 파동도 일어났을리 만무한 일입니다.결국

노동법내용은 뒤로 하고 통과절차가

잘못되어 문제가 확대됐던 것 아닙니까.세상은 변하는데 정치는 그냥

있으니 그 난리를 겪은 겁니다.”

-姜부총리도 그날'새벽동원'에 참여하지 않았습니까.

“다 하니 난들 어떻게 합니까.그건 이야기가 기니 다음에 합시다.”

이야기는 자꾸 정치사회적인 쪽으로 흘러갔다.경제정책의 사령탑을

맡았으면서 그는 인식부터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했다.

“우리 사회는 공과 사를 혼동하는 일이 너무 많아요.재벌 오너는

기업을 자기 것으로 여기고,권력자는 권력을 사유물로

생각하지요.선진국이 되려면 이런 것부터 반드시 정돈돼야

합니다.궁극적으로 세가지가 바로 서야 합니다.검찰과 세정당국

,그리고 중앙은행이 그것입니다.검찰이 공권력을 바로 세우고,법대로

국세청은 세금을 제대로 걷고,중앙은행은 독립적으로 통화운영을 해서

물가안정을 다지는 일입니다.그래야 자본주의 경제가 되는 겁니다.”

검찰.稅政.중앙銀 바로 서야

-그동안 정부도 개혁의 기치를 내걸고 하느라고 했는데,무엇이 잘못된

겁니까.

“미래에 소홀했습니다.온 세계가 미래지향적인 전환을 시도하고 있을때

우리는 과거사에 매달리며 시간을 허비했습니다.물론 과거를 바로세워야

미래설계도 올바를 수 있습니다.너무 과거청산에 매달린 나머지

미래쪽을 소홀히 했다는 이야기지요.

국제화나 세계화를 말로만 떠들었을뿐 실상은 달라진게

없어요.미래지향은 구호나 슬로건으로 되는게 아닙니다.이를 뒷받침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합니다.규제철폐만 해도 정부와 기업을 종래의

수직관계에서 수평관계로 바꾸자는 얘기입니다.정치가

집중돼 있는 상황에서 재벌 집중은 어쩔 수 없지요.정치가 분산돼야

합니다.부산의 정치가 부산에서 결정되면 재벌보고 오지 말라고 해도

부산에 오지 않겠습니까.금융도 문제지요.자율화가 제대로 안된

상태에서 안전한 대출을 찾다보니 재벌

한테 돈이 몰리는 것이지요.”

-정부가 정책을 하려해도 재벌문제가 걸림돌이라는 지적들이 많은데,이

점은 어떻게 보십니까.

“재벌 문제는 걱정할 것 없어요.재벌이 지금대로 가면 저절로 망하게

되어있거든요.재벌은 산업화시대에서나 힘을 쓸 수 있는

것이지,정보화시대에서는 견뎌낼 수 없는 겁니다.정보화시대에 알맞은

기업단위는 중소기업이기 때문에 기존재벌들이

여기에 맞춰 변신하지 않으면 저절로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그러니

정부는 재벌을 규제하기보다는 유망한 벤처기업들을 육성 지원하면 되는

겁니다.”

-70년대말 마치 안정화시책의 전도사처럼 사방을 돌아다니며

설득작전을 폈던 것이 기억납니다.당시 생각으로는 관료중에 저런

사람도 있나 싶더군요.그러나 너무 이상론에 치우쳐 현실을 가볍게

본다는 지적도 많이 받지 않았습니까.

“안정화시책 당시 30년 묵은 인플레를 단절하겠다고 했더니 사람들이

웃기는 소리라고 했지요.하지만 당시에 결국 해내지 않았습니까.하면

되는데 안했을뿐입니다.6공때 북방정책을 펴길래 망하는 길이라고

비판한 기억이 있습니다.선진국과 싸

워야할 때 엉뚱하게 북방에 가서 시간을 허비했지요.그 결과 지금

미국시장에서도 밀리고 있습니다.요새 경제가 어렵다보니 멕시코와 곧잘

비교합니다만 정말 자존심 상하는 이야기입니다(이 대목에서 그는 다소

흥분했다).아무리 우리가 망가졌기로서니 어떻게 멕시코와 비교합니까.”

국제수지 적자 점진적 해결

-현실적으로 국제수지 적자가 크게 늘고 있고,외채가 빠르게 늘고 있지

않습니까.무슨 묘안이라도 있습니까.

“당장 국제수지 적자를 줄일 묘안은 없습니다.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금이라도 고칠 것을 고쳐 점차 나아지도록 하자는 것입니다.거창하게

벌이기보다 정부부터 허리띠를 조르고 하나하나 풀어나갈

작정입니다.은행의 해외차입 한도를 풀어준

것도 한국은행의 그늘에서 벗어나 은행들이 실력껏 서보라는

뜻입니다.”

-당장 논란이 없는 부문은 즉시 실행될 수 있겠지만 한보나

노동문제처럼 골칫거리들을 어떻게 풀어나갈겁니까.

“한보는 옛날 식으로 풀어선 안됩니다.타당한 가격으로 3자에게

인수시키고 손해본 돈은 은행이 감당해야지요.다만 신용질서 유지를

위해 은행을 망하게 놔둘 수는 없는게 현실이지 않습니까.앞으로 꼭

필요한 틀을 만들어가되 현실적으로 대처할 작정입니다.”

-노동문제는 어떻게 보십니까.

“우리의 임금수준이 국제적으로 높다는 사실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테고 아무튼 최근의 상황은 기업이 임금을 더 올려줄 여력이 있는지

의문입니다.따라서 정부도 임금보다는 고용안정에 초점을 맞출

생각입니다.”

국내銀 신용도 외국서 잘 알아

-경제가 나빠지면 노사분규도 자연히 가라앉지 않겠느냐는 말씀인데

그러나 일부에선 노동운동이 경제상황과 무관하게 정치세력화하려는

움직임도 있습니다.

“근로자가 조직을 만든뒤 정치에 뛰어드는 것은 옛날식입니다.그럴수록

경제는 가라앉습니다.이런 일이 제대로 방향을 찾도록 해주는게

구조조정이지요.정보화시대가 될수록 개개인의 업무가 제각각이어서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기가 어렵습니다.따라

서 노사간의 협상도 점점 개인별 특성에 맞춰 하게될 것입니다.집단적

노사협상은 조만간 사라질 것으로 봅니다.”

-최근 모은행의 어려움을 기사화했더니 신문이 국내은행의

해외신용도를 떨어뜨렸다고 항의해 곤욕을 치르고 있습니다.이런때

언론이 어떻게 해야 하는겁니까.

“국내은행의 신용도는 국제금융가에서 더 잘 알아요.한국언론이

봐준다고 모르겠습니까.문제가 있으면 있는대로 파헤쳐서 제대로 알리고

올바른 대응책을 강구해야 합니다.논객이 없습니다.모두 양비론이나

양시론이지요.독하게 얘기하다가도 언론에

만 나서면 모두 황희정승이 돼버립니다.”

-정권말기의 이른바 레임덕 현상을 많은 사람들이 걱정합니다.이런

상황에서 제대로 정책을 펴나갈 수 있겠습니까.

“경제정책에는 임기가 없다고 직원들에게 말했습니다.아무리 늦었다고

생각해도 실천에 옮기면 바로 그때가 적기입니다.돌이켜 보면 아쉬움도

많지요.실명제나 금융자율화 역시 80년초에 했더라면 지금 이같은

고민은 안했을 겁니다.도리어 소신

껏 추진할 수 있는 측면도 있습니다.”

-대통령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았습니까.

“그렇게 물어보면 이상하고….아무튼 소신껏 일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정리=고현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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