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세 시인, 고향서 한국시조 부흥을 노래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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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로 시조시인 정완영(89·사진) 선생은 요즘 주소지 서울보다 직지사 입구에 머무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정 시인의 고향인 경북 김천시가 10일 그의 호를 딴 ‘백수(白水)문학관’을 직지사 입구인 대항면 운수리에 개관했기 때문이다.

백수문학관은 3500여㎡ 넓이에 지하 1층, 지상 1층의 기와집으로 지어졌다. 그가 태어난 봉산면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전시실에는 유치환·박목월·박종화·김광섭·유진오 등 문인들이 시인에게 보낸 육필 편지가 진열돼 있다. 초·중·고 교과서에 실린‘조국’ 등 그의 대표 시조를 감상할 수 있다.

‘행여나 다칠세라 너를 안고 줄 고르면/떨리는 열 손가락 마디 마디 에인 사랑/손닿자 애절히 우는 서러운 내 가얏고여…’(조국)

“남들이 좋다고 평가하는 작품과 자신이 애착을 갖는 작품은 다릅니다. ‘조국’은 출세작이긴 하지만 나는 ‘을숙도’와 ‘부자상’ ‘분이네 살구나무’를 더 좋아해요.”

문학관을 안내하던 정 시인은 짚고 있던 지팡이를 들어 자기 작품을 가리키며 읊었다. 그는 귀가 조금 어두웠다. 시인이 남의 말을 금방 알아듣지 못하면 동행한 딸 은희(54)씨가 다시 한번 말을 해줬다. 하지만, 목소리며 걸음걸이는 90을 바라보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정했다. 전시실 건너편에 자료실·세미나실과 함께 마련된 집필실에서 여전히 창작 활동을 하고 있었다.

백수문학관은 문인이 생존해 있는 데다, 시조시인의 첫 문학관이라는 점에서 이례적이다. 그는 자신의 문학관이 만들어진 데 대해 “흡족하다”라고 하면서도 “이곳을 시조 중심지로 만들어 나가야 할 무거운 책무를 동시에 느낀다”라고 말했다. “웬만큼 할 일을 했으니 내일 죽어도 괜찮지만 1년만 문학관의 기틀을 잡아 놓고 싶다”라는 뜻도 밝혔다.

“시조는 민족문학이죠. 중국의 한시, 일본의 하이쿠, 서구의 14행 소네트와 같은 민족적인 전통 율조죠. 시조란 우리의 정신이 배인 숨결이요, 기본 율조란 말입니다.”

정 시인은 고려 중엽부터 800여 년을 이어 온 한국 시조가 다시 부흥기를 맞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조는 결코 문학의 변방이 아니라고 했다.

그가 지금껏 쓴 시조는 2000편 정도. 그는 요즘 시조에 관심있는 사람이 5만 명에 이른다고 강조했다. 이들 중에는 시조를 배우려 미국이나 중국·일본 등지서도 강의를 받으러 오는 이도 있다고 전했다. 그가 등단시킨 시조시인만 170여 명에 이른다.

그는 고향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다. 백수라는 호도 ‘김천’의 ‘천(泉)’을 아래 위로 파자한 것이다. 젊은 시절엔 김천에 시조를 창작하는 ‘시조마을’을 만들려고 애썼다. 고향을 노래한 시도 많다. 3년 전쯤엔 고향에 내려오면 머물 집을 직지사 가까운 곳에 지었다. 고향을 떠난 지 60여 년 만이다. 그게 알려지면서 김천시가 문학관 건립을 서두르게 됐다. 고향과 시인, 참으로 어울리는 두 낱말이다.

글=송의호 기자, 사진=프리랜서 공정식

◆시조시인 정완영=1919년 김천에서 태어나 조부로부터 한학을 배우며 봉계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60년 국제신보 신춘문예에 시조가 당선했으며, 시조집 ‘채춘보’ ‘묵로도’ 등과 동시집을 냈다. ‘시조창작법’ ‘고시조감상’ 등도 펴냈다. 제11회 한국문학상과 제3회 중앙시조대상 등을 받았고, 한국시조시인협회 회장을 지냈다. 이병기·이은상·김상옥·이호우를 잇는 시조시단의 거목으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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