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MovieTV] 순정파 청년, 삼류 건달 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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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우는 스물넷이다. 웃으면 눈이 감기는 선한 인상의 청년이다. 그런 사람이 건달에, 나쁜 일을 서슴지 않는 악덕 사업가 역이라? 임권택 감독의 99번째 작품 '하류 인생'은 제작 발표회부터 삐걱거렸다. 투자자들은 조승우를 면전에 두고 "유약해 보이고 개성도 없어 보인다"는 걱정 같은 불만을 늘어 놓았다. 그때 조승우는 침묵했다. 이 젊은 청년의 머릿속에는 '보여주고 나서야 할 말이 있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21일 영화가 개봉되자 걱정은 기우로 판명났다. 입을 이죽거리며 "또 까불면 아주 죽인다"는 영화 속 최태웅(조승우)에게서는 '춘향뎐'의 이도령도, '클래식'의 순정파 준하도 발견할 수 없었다. 하류처럼 굴다가 인생이 피폐해진 건달의 모습만 있었을 뿐이다. 임권택 감독의'춘향뎐'으로 데뷔한 지 4년. 배우 조승우는 어떤 변화를 겪었을까.

◆"임 감독, 이젠 무섭지 않더라."=4년 전 이도령은 잔뜩 주눅들어 있었다. 카메라 앞에 선다는 게 부담스럽고 임권택이라는 이름 석 자가 주는 기에 눌려서 어떻게 연기했는지조차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래서 한동안 영화라는 장르가 어렵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지하철 1호선'등 뮤지컬에 출연하고, '후아유''H''클래식'등에서 다른 감독들과 호흡을 맞췄다. 그는 '클래식'에서 첫사랑의 아릿한 감정을 절제된 연기로 표현해 많은 여성 팬을 울렸다. 그래서 적잖은 이들이 그를 '멜러 배우'로 기억하고, "왠지 따뜻할 것 같은 남자"로 꼽는다.

그러나 '클래식'의 인기와 연기에 만족할 그가 아니었다. 어느날 태흥영화사를 찾아갔더니 임권택 감독이 "태권도 배우고 골프도 좀 치라"고 주문했다. 임감독과의 작업은 부담스러운 것이기도 했지만, '느슨해진 나사를 조여주듯 나를 긴장시킬 것 같아' 군말 없이 응했다. 그리고 시작한 것이 영화 '하류 인생'. 그는 4년 전과 달랐다. 자기 의견을 말할 줄 아는 생각하는 배우가 되어 있었다. "감독님은 오히려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내 모습을 좋아하더라. 촬영 중반부터는 정말 많이 믿어줬다. 대사도 내 입에 맞게 고쳐보기도 하고…." 그가 만들어낸 대사는 어떤 대목일까. "여기 비프 스테이크"라던 원래 대사는 "여기 스테키"로 바꿨단다. 1960년대에는 왠지 그렇게 말할 것 같더라나. 또 욕설도 만들어 넣었다. "어르신들이야 욕을 잘 모르시지 않나. 그렇지만 영화에 계속 같은 욕만 나오면 재미없을 것 같아 다양하게 변주를 했다."

◆"나만의 '과거 배우기'를 찾다."='하류 인생'은 57년에서 시작된다. 어린 조승우가 들어보지도 못한 시절의 이야기다. 그리고 영화는 조승우가 태어나기도 전인 70년대 초반에 막을 내린다. 그 시절 영화와 책을 보며 간접 경험을 할까, 그 시대를 살아본 인물들을 인터뷰해볼까? 조승우는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먼저 영화 음악을 맡은 신중현의 음악을 들었다. '하류 인생'의 명동 거리 세트장도 수시로 찾았다. 그리고 빛바랜 부모님의 사진첩을 꺼내 들었다. 그는"거칠었던 그 시대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론적으로 분석하기 시작하면 인물을 못 살릴 것 같았다. 세트장을 배경 삼아 음악을 듣고, 그 속에 푹 빠져 마치 과거로 여행을 떠난 듯한 느낌에서 살았다"고 한다.

조승우가 텍스트로 삼은 대상은 또 있었다. 알려지다시피 '하류 인생'은 50 ~ 60년대 청춘들의 자화상이다. 태흥영화사의 이태원 사장, 임권택 감독, 정일성 촬영감독 등 수많은 이의 일화가 녹아 있다. 이태원 사장은 "승우가 내 말투.몸짓을 유심히 보더라. 연기 자료로 삼으려는 듯했다"고 전한다.

◆"욕심 부리지는 않는다."=그는 꽃미남 배우로 분류되지는 않는다. "외모로 평가받지 않는 게 오히려 편하다"는 그의 말은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매년 영화 한 편과 연극이나 뮤지컬 한 작품을 꼬박꼬박 해올 수 있었던 것도 인기에 휘둘리지 않고, 지나간 이미지에 얽매이지 않는, '마음 비움'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번에 건달 역을 했으니, 다음에는 멜러 연기를 해볼까하는 전략도 없다. 시나리오가 좋으면 언제든 달려가 '하류 인생'때처럼 현장에서 살며 새로운 인물을 만들어볼 의욕만 있을 뿐이다.

글=홍수현 기자<shinna@joongang.co.kr>
사진=김상선 기자<ss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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