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포커스>'후진국型' 금융비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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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2년전 국제금융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영국과 브라질 두 은행의 대금융사고가 있었다.2백50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던 영국의 베어링은행은 오늘날 세계 머천트뱅크들의 원조로,전통과 유래가 깊은 은행이었다.이 은행의 싱가포르 지점에서 일

본 닛케이 주가지수를 이용한 고도의 파생상품을 잘못 다루는 바람에 14억달러의 손해를 봤다.역대 왕실의 예금도 관리해온 전통깊은 은행이었건만 영국정부는 단호히 구제금융을 거절,결국 이 은행은 단돈 1파운드(약 1천5백원)에 네덜란드

의 한 보험회사에 팔렸다.

바로 그 즈음 브라질에서는 상파울루주립은행이 주지사와 정치인들의 농간으로 거액의 부실대출을 해준 결과 수십억달러의 손실을 보고 파산에 직면했으나 정부는 긴급 구제금융으로 그 손실을 얼버무려 주었다.

영국 은행은 국제금융의 최신 파생상품 때문에 본 손해를 주주들이 책임지고 은행을 내놓음으로써 시장경제 아래서의 철저한 책임경영의 표본을 보인 반면 브라질에서는 정치인들의 압력으로 부정대출해줘 당연히 망해야 할 은행이 결국 국민의

세금으로 책임을 면하게 된 것이다.

이번 한보사건이 영국 베어링은행 같은 선진국적 금융사고인지 브라질 상파울루은행 같은 후진국적 금융비리인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을 것이다.한보의 은행빚 5조원은 자기자본의 20배라니 어떻게 국제경기를 크게 타는 철강회사에 이렇게 많은

여신을 해줄 수 있었을까.선진국 은행들은 철강회사 같은 경기성(cyclical)업종의 부채비율이 자기자본금의 3배 이상 넘으면 위험하다고 본다.

더구나 제일은행의 1조1천억원 한보 대출금은 은행 자본금의 60%라고 하니 어이가 없다.선진국 은행들은 한 고객회사에 자기자본금의 15%이상,담보대출인 경우도 25%이상 대출해 주지 않는게 철칙으로 돼있다.

우리가 선진국이 되려면 선진국처럼 행동해야 하는데 큰 금융사고를 당할 때마다 항상 구태의연한 후진국형 금융비리가 되풀이되는 것을 볼 수 있다.1인당 GNP가 1만달러를 넘어섰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이 됐다고 곧 선진국

이 다 된 것처럼 자만하고 과소비해서는 안된다.터키는 OECD 고참멤버이면서도 1인당 GNP가 기껏 2천5백달러 정도에 그치는 후진국으로 남아있다.한 나라가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것이 후진국에서 중진국 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을 터키뿐만 아니라 남미의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의 예에서도 볼 수 있다.

세계 각국은 이제 이데올로기 중심의 냉전체제 대신 경제이기주의에 입각한 무한경쟁시대에 돌입했다.이러한 환경속에서 우리나라 같은 중진국의 입지는 남달리 불리하다.선진국들은 이미 축적된 자본.기술.경영능력을 토대로 이 무한경쟁을 선도

해 나갈 위치에 와 있으며,중국.필리핀.인도네시아 같은 후발개도국들은 아직도 저렴한 임금과 땅값을 기초로 선진국의 기술과 자본을 잘 도입만 하면 우리나라 같은 고비용 중진국을 추격하는데 유리하다.

우리나라가 후발개도국들에 따라잡히느냐 아니면 여기서 더 도약해 선진국 대열에 성공적으로 진입하느냐는 우리 국민 모두의 노력에 달렸다.지난 20~30년간 우리가 달려 왔던 경주와는 차원이 다른 새로운 경주가 다시 시작됐고,여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정부와 기업가.근로자들이 힘을 합치고 또 한번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

우리나라가 브라질처럼 정치가와 정부관료들과 금융계로'철의 3각관계'를 유지하는 한 제2,제3의 한보사태는 또 터질 것이고,우리나라는 영원히 중진국 수준에서 주저앉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번 한보사건을 계기로 고질적인 관치(官治)금융에서 과감히 탈피해야 한다.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관치금융의 본산인 재정경제원의 대대적 기구개편이 있어야 한다.금융.보험.증권 담당국들을 완전히 폐지하고 그 기능을 구미 선진국들처럼 총

리실 직속으로 위상을 높인 은행.증권.보험감독원등에 이양해야 한다.그대신 재경원은 세계화의 경제체제에 걸맞게 국제경제기구 전담부서들을 대폭 강화해 우리의 대외 경제위상에 직접 관련있는 국제기구들의 정책결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국제사회에서 우리 몫을 꼭 지켜야 한다.우리의 앞날은 이제 의식의 선진화,경제의 세계화에 달렸다.

<사진설명>

朴允植〈조지워싱턴대교수.경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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