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등소평 이후의 중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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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중국의 최고실권자 덩샤오핑(鄧小平)이 19일 밤 세상을 떠났다.鄧의 죽음은 오랫동안 예견된 것으로 충격적인 것은 아니다.그러나 중국 정치에서 차지하는 鄧의 절대적 위치,특히 현재 중국이 국가의 사활을 걸고 추진하고 있는 개혁.개방

정책의 총설계사라는 점에서 鄧의 죽음이 앞으로 몰고올 파문은 엄청나다.이같은 파문은 비단 중국뿐 아니라 앞으로 국제질서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하다.

鄧의 일생은 현대중국의 역사와 궤(軌)를 같이 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1922년 약관 18세에 공산당원이 된 鄧은 마오쩌둥(毛澤東)과 함께 49년 중국에 공산정권을 수립한 주역이었다.그후 실용주의 노선을 대표하는 정치가로

毛의 이데올로기 우선주의와 대립했다.이 때문에 鄧은 60년대 문화대혁명과정에서 실각,혹독한 시련을 겪었다.73년 부총리직에 복귀한 鄧은 그후 4인방에 의해 다시 실각했으나 77년 재기함으로써'부도옹(不倒翁)'이란 별명을 얻었다.

鄧의 위대성은 이때부터 드러난다.78년 최고실권자가 된 鄧은 국가진로를 계급투쟁 중시의 극좌노선에서 사회주의 시장경제로 전환하는 혁명적 조치를 취했다.이는 중국사회를 철저히 변화시키는'제2의 중국혁명'이었다.개혁.개방이 시작된 7

8년 3천5백88억위안(元)에 불과했던 국내총생산(GDP)은 95년 5조3천억위안으로 뛰어올랐으며,매년 10%이상의 경제성장을 기록하는 눈부신 실적을 올렸다.이같은 성장의 결과 중국은 미국.일본에 이은 세계 3위의 경제력을 쌓았으며

,21세기 미국을 제치고 세계 제1의 경제대국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이같은 경제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鄧의 노선은 사회주의 고수라는 원칙에서 한치의 양보도 없었다.경제발전에 필연적으로 따라온 민주화 요구를 鄧은 무자비하게 탄압했다.89년 6.4 천안문(天安門)사건은 鄧의 확고한 입장을 그대로 나타낸

것이며,그 후유증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鄧의 사망에도 불구하고 정치구조는 당분간 안정을 유지할 전망이다.천안문사건 이후 갑자기 등장한 장쩌민(江澤民)국가주석은 그동안 鄧의 후광(後光)을 업고 당.정.군을 한손에 잡은 최고지도자로서의 입지를 강화해 왔다.그러나 江주석은

鄧과 같은 카리스마가 부족할뿐 아니라 국가를 끌고 나아갈 독자적 비전이 부족한 것이 단점으로 지적된다.또 군경력이 없는 테크노크라트 출신이란 것도 약점이다.따라서 江주석을 정점(頂點)으로 보수.개혁파가 권력을 나눠갖는 집단지도체제를

유지할 전망이다.이런 의미에서 올 가을 열릴 제15기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는 미래의 중국 정치구조를 결정할 중요한 행사가 될 것이다.

장쩌민체제가 당면하게 될 문제는 간단치 않다.경제적으로 개방이후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지역간.계층간 빈부격차,재정적자를 가중시키고 있는 국영기업,높은 인플레율,사회 전반에 미만(彌滿)한 부정부패 등으로 불안한 상황이다.정치적으론

천안문사건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반체제.민주화 세력의 도전 또한 만만치 않을 것이다.또 최근 부쩍 늘고 있는 소수민족의 자치.독립요구도 주의를 요하는 대목이다.이같은 불안요인들이 정치적 혼란으로 이어질 경우 군부의 영향력이 커질 것

이 분명하며,江체제의 군에 대한 통제여하가 중요한 요인이 될 것이다.

이같은 불안요소에도 불구하고 한가지 변할 수 없는 것은 중국이 개방.개혁노선을 포기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점이다.현재 중국 지도부는 보수.개혁진영 모두 개방.개혁의 필요성에 이견(異見)이 없으며,다만 개방.개혁의 속도와 그로 인

한 부작용을 어떻게 줄이느냐에 이견이 있을 뿐이다.

鄧의 죽음은 한반도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 틀림없다.우선 당장 황장엽(黃長燁)북한 노동당비서 망명사건처리도 지연될 것으로 보인다.뿐만 아니라 鄧사망으로 북한과 가까운 보수파가 득세할 경우 개혁파도 실리중심의 친한(親韓)정책을 고

집할 수 없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그런 의미에서 우리 외교당국은 지금과 같은 실리우선의 대중(對中)외교노선을 유지하되 상황변화에 따라 유연성있게 대처하는 외교역량을 길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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