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세기를찾아서>4.그리스 마라톤평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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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이 엽서는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 북동쪽, 정확히 36.75㎞에 있는 ‘마라톤’평원에서 띄웁니다. 당신도 잘 알고 있듯이 이곳은 페르시아전쟁의 현장입니다. 당시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페르시아의 대군을 맞이하여 고립무원의 아테네 병사들이 비교하기 힘든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이를 물리친 격전의 땅입니다.

나는 마라톤평원이 내려다보이는 산기슭에 올라 2천5백년전의 광경을 상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아비규환의 격전은 보이지 않고 한 어린 병사의 모습만 떠오릅니다. 기적같은 승리를 전하기 위하여 평원을 달리는 병사의 모습만 보일 뿐입니다. 전쟁의 패배와, 패배에 뒤따를 파괴와 살육의 공포에 가슴죄며 아고라에 모여있는 아테네 사람들에게 한시라도 빨리 승전보를 전하기 위하여 잠시도 걸음을 늦추지 않고 달려가 “우리가 이겼다”는 한마디를 외치고 숨을 거둔 어린 병사의 모습이 생생하게 되살아납니다. 올림픽의 꽃인 마라톤경주가 이 병사를 기리기 위한 것임은 당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시 그가 출발하였던 곳에는 전사자를 추모하는 위령탑과 오륜마크가 새겨진 작은 성화대가 서 있고 성화대와 나란히 대리석을 땅에 박아 만든 출발선이 있습니다. 나는 바로 그 출발선에 서서 벅찬 승전보를 가슴에 안고 달려나갔던 어린 병사의 마음을 헤아려 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마라톤경주에서 출발신호를 기다리는 선수들의 심정과 비교해 보았습니다. 참으로 엄청난 차이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이곳 마라톤평원을 찾아올 때는 우선 많은 역사서가 지적하고 있는 지형상의 특징을 확인해 보려는 생각이 없지 않았습니다. 6백척의 배로 마라톤만(灣)에 상륙한 페르시아 대군이 갑자기 개미목처럼 좁아진 협곡에서 학익진(鶴翼陣)을 펼치고 있던 아테네의 중장밀집(重裝密集) 창병(槍兵)의 돌격과 포위로 말미암아 대병력의 이점이 한순간에 무산되어버린 전략상의 패인이 어렵지 않게 확인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결정적인 승인(勝因)은, 아마 어린 병사의 추억 때문에 갖게 되는 감상이 없지 않겠지만, 가족들의 생명과 자유를 지켜내려는 결연한 용기였음을 다시 한번 절감하게 됩니다.

생각하면 이 마라톤전투의 승리는 단지 아테네를 지켜낸 승리에 그치지 않고 당신의 말처럼 ‘유럽’을 만들어낸 승리인지도 모릅니다. 2천5백년의 장구한 세월이 그때의 단검조각 하나 남겨두지 않은 황량한 벌판에 불과하지만 이곳의 대리석으로 표시된 출발선은 그야말로 유럽의 출발지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유럽이 유럽땅으로 보전될 수 있게 한 유럽의 탄생지입니다. 물론 그로부터 10년후인 기원전 480년 살라미스해전에서 동양의 제국 페르시아의 서진(西進)이 다시 한번 저지됨으로써 비로소 유럽이 확고하게 그 땅을 갖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라톤전투와 살라미스해전을 승리로 이끈 아테네는 델로스동맹의 맹주가 되어 페리클레스의 황금기로 이어졌으며 이 찬란한 고대 그리스문명은 르네상스를 거쳐 유럽의 정신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실로 유럽의 땅과 유럽의 정신이 탄생되는 곳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라톤전투에 참가한 전사들이 그 갑옷과 무기를 스스로 마련하였던 것과는 달리 살라미스해전에서는 무장(武裝)을 마련할 능력이 없는 시민들도 노젓는 병사로 참전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만큼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가 확장될 수 있었던 점도 적지 않은 변화였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찬란한 문화와 민주주의가 승전과 환희로 이루어진 아폴로적 세계만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그 속에는 그보다 더 짙은 비극의 아픔이 강물처럼 흐르고 있음이 사실입니다.

나는 마라톤평원을 떠나 다시 살라미스해협을 찾았습니다. 화염과 포성, 그리고 전사자들의 피로 물들었던 그날의 그 바다는 간곳 없고 잠든 듯 흔들리고 있는 작은 어선에서 고기를 손질하던 늙은 어부가 도리어 내게 까닭을 물어옵니다.

나는 에게해의 맑은 바닷물에 손을 씻으며 생각했습니다. 나라의 승패와 흥망이란 유장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는 한바탕 부질없는 춘몽(春夢)인지도 모릅니다. 찬란히 꽃피웠던 그리스의 황금기도 ‘그리스의 자살’이라는 30년간의 펠로폰네소스전쟁으로 추락해가다 드디어 마케도니아의 젊은 왕에게 망하게 됩니다.

지금은 유럽의 나라들이 비록 유럽연합(EU)이라는, 나라를 뛰어넘는 새로운 틀을 만들어가고 있지만 금세기가 보여준 광기어린 전쟁과 지금도 가시지 않고 있는 반목과 증오에 생각이 미치치 않을 수 없습니다. 돌이켜보면 인류사가 이룩해온 문명은 개별국가의 흥망과는 상관없이 이어져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나라가 없어지는 것을 망(亡)이라 하지 않고 도(道)가 없어지는 것을 망이라 했던 고인(古人)의 역사관을 수긍한다면 국가란 문명을 담는 그릇이 못되고, 문명은 국가라는 그릇에 담기에는 너무나 크고 장구한 실체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마라톤평원의 출발점에서 느꼈던 아쉬움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린 병사가 숨을 거두며 외쳤던 한마디 말과, 올림픽 마라톤경주의 승리자가 결승점에서 가슴으로 테이프를 끊으며 외치는 말의 차이 때문입니다. 전자(前者)의 그것이 ‘우리는 이겼다’였음에 비해 후자의 그것은 ‘나는 이겼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가 ‘우리’를 이기는 것이 바로 오늘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신영복 성공회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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