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초상화 ‘카메라’를 이용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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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눈꺼풀 위에 접힌 얇은 주름, 관자놀이 부근에 퍼진 검버섯, 입술 아래 사마귀와 터럭을 하나하나 세어서 그린 듯한 턱수염·…. 몸은 짙푸른 도포 자락 안에 꼭꼭 숨기고 있지만 약간 치켜올라 간 눈과 단호한 인상을 주는 얼굴 윤곽은 그림 속 인물의 꼬장꼬장한 성격까지 드러내 주는 듯하다. 조선시대 초상화의 주인공들은 이렇듯 생생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터럭 하나라도 닮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다”라는 믿음 아래 사실적 묘사를 가장 큰 미덕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조선후기 화가들은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기 위해 어떤 방법을 사용했을까.

미술사가이자 문화재청 문화재 감정위원인 이태호 교수(명지대 미술사학)는 근대적 광학장치인 카메라 옵스쿠라에 주목했다. 조선 후기의 초상화를 집중분석한 신간 『 옛 화가들은 우리 얼굴을 어떻게 그렸나: 조선 후기 초상화와 카메라 옵스쿠라』(생각의나무)에서 그는 “그 단서는 정약용, 이규경, 최한기, 박규수 등 조선 후기 학자들의 기록에서 발견된다”고 말한다.

18세기 후반 이명기가 그린 ‘강세황 71세 초상’(1783년). 묘사력이 탁월한 작품으로 꼽힌다. 옷 주름에 선명한 입체감을 살렸고, 눈동자와 주름까지 생생하게 보이도록 치밀하게 그렸다.

◆정약용과 ‘카메라 옵스쿠라’=라틴어인 카메라 옵스쿠라(camera obscura)는 ‘어두운 방’ 혹은 ‘어둠 상자’라는 뜻이다. 르네상스 이후 1830년대까지 카메라 발명에 앞서 사용되던 광학기구를 말한다. 상자 내부의 어둠 속에 바늘구멍으로 들어온 빛을 따라 일정한 거리에 벽면이나 흰 종이를 갖다놓으면, 그 스크린에 사물이 거꾸로 비치게 되는 원리를 응용한 것이다. 따라서 종이에 비친 형상을 따라 밑그림을 그리면 마치 사진을 놓고 따라 그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확하게 묘사하는게 가능하다.

다산 정약용은 그의 저서 『여유당전서』에 쓴 ‘칠실관화설’(漆室觀畵說)에 카메라 옵스쿠라로 풍경을 감상해본 글을 남겼다. “(…)사물의 형상이 거꾸로 비쳐 감상하기 황홀하다. 이제 어떤 사람이 초상화를 그리되 터럭 하나도 차이가 없기를 구한다면 이 방법을 버리고서는 달리 좋은 방법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마당 가운데서 진흙으로 빚은 사람처럼 꼼짝도 않고 단정이 앉아 있어야 한다….”

카메라 옵스쿠라 뷰파인더에 거꾸로 비친 얼굴을 따라 그리는 모습. 영국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는 그의 저서 『명화의 비밀』에서 서양의 거장 화가들이 이 광학기기를 이용해 그림을 그렸다고 주장했다. [생각의나무 제공]

◆1780년대가 전환점=카메라 옵스쿠라는 중국을 거쳐 조선에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교수는 1784년에 북경을 다녀온 정약용의 매부 이승훈(1756~1801)이 이에 대한 정보를 가져왔을 가능성도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카메라 옵스쿠라가 당시 폭넓게 유포된 것 같지는 않다”면서도 “당시 실학파 문인들에게 관심을 끌었던 새로운 광학도구였음에는 틀림없다”고 말했다. 그는 “조선시대에는 ‘초상’은 외모는 물론 대상인물의 정신까지 그린다는 뜻으로 ‘전신’(傳神)이라 불렸다”는 점을 강조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싶은 화가들에게 카메라 옵스쿠라는 충격적일 만큼 새로운 자극이 됐을 것이란 해석이다.

초상화 기법이 정조 시절인 1780년 전후로 변화의 폭이 컸다는 점도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한다. 이 무렵 초상화에서는 입체감을 살리는 기법이 두드러졌으며 안면 묘사도 훨씬 치밀해졌다. 특히 이명기(1756~?)의 ‘강세황 초상’ ‘오재순 초상’등은 대표적 사례다.

이 교수는 “그의 초상화들은 뚜렷한 입체감, 정치한 필치의 실재감, 투시도법에 따른 시각 등에서 카메라 옵스쿠라를 활용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2004년과 2007년에 ‘카메라 옵스쿠라와 18세기 초상화풍’을 소재로 두 편의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그는 “김홍도나 이명기처럼 묘사 기량이 뛰어난 화가들이 카메라 옵스쿠라를 활용하면서 조선후기 회화를 ‘과학적 사실주의’ 수준으로 이끌었다”며 “특히 정약용이 그 증거를 남긴 것은 회화사에 매우 소중한 기록”이라고 말했다.  

이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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