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철환의 당당한 이류] 탤런트 사미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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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BC 새 일일드라마 ‘왕꽃 선녀님’에서 무용인 한미녀 역을 맡은 사미자는 대한어머니회 무용반에 가입해 석달간 땀을 흘리며 춤을 익혔다. 그녀의 연기 철학은 바로 ‘집념’이다. [신동연 기자]

인터뷰를 요청하며 한번 만나줄 수 없겠느냐고 물으니 생글생글 눈웃음이 묻어나는 인사와 함께 혹시 자신이 춤추는 곳으로 올 수 없겠느냐고 운을 뗀다. 호기심 만발. 찾아간 약속장소는 대한어머니회 '회원의 날' 행사장. 곱게 한복으로 단장한 그녀는 동료들과 함께 고난도 살풀이춤을 멋들어지게 선보였다. 객석의 주부들은 고함을 지르고 난리다. 도대체 무슨 사연일까.

새로 시작하는 MBC 일일 드라마 '왕꽃 선녀님'의 배역(무용인 한미녀)에 흠뻑 빠져들고자 어머니회 무용반에 정식으로 가입해 3개월 동안 땀에 절며 춤을 익힌 것이다.

그녀는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에서 3남 1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토지개혁 때 땅을 빼앗긴 걸 분해하시던 아버지는 그녀가 열세살 때 병으로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천진함과 강인함의 양면을 지닌 분이셨다. 그 성격을 가늠케 하는 일화가 있다. 이화여중에 합격했지만 도저히 입학금과 등록금을 내지 못할 형편이었다. 가족이 모여 대책 없는 회의를 하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단호한 표정으로 일어섰다. "가자."

그 길로 어머니는 딸을 이끌고 학교 서무실로 '돌진'했다. 지금은 돈이 없지만 나중에 추수하고 나면 반드시 내겠다는 다부진 약속. "얼굴에 모닥불을 끼얹는 기분이었죠." 미자는 부끄러웠지만 서무과장은 너그러웠다. 그러시라고 하고 그녀의 입학을 순순히 허락했다. 그 후 살아가면서 힘겨울 때마다 어머니의 그 말씀을 부적처럼 끄집어내곤 한다. "가자."

'사미자 브랜드'인 명랑천진성의 뿌리는 어머니의 비옥한 마음 밭에서 자랐을 터이다. 실은 30대까지는 피해의식이 유별났다. 대학에 간 오빠들 때문에 자신의 꿈이 희생당했다고 원망도 많이 했다. 1958년 이화여고를 마쳤지만 그녀는 대학에 원서조차 내지 않았다. 친한 친구가 이대 입학시험을 치르는 데 그냥 응원(?)차 따라갔다.

이 맹랑한 처녀는 합격한 친구와 함께 입학식에도 참석해 총장님의 격려 말씀을 들었다. 한 학기 동안 강의실은 물론 채플에까지 출석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짜 대학생은 집으로 향해 걸어가며 큰 소리로 다짐했다. "지금은 가짜지만 나중에 진짜로 성공할 것이다."

스물 셋에 좋은 남자 만나 결혼했다. 남편 김관수씨는 한동안 연기자 생활을 하다가 월급쟁이로 돌아섰다. 너무 꼿꼿한 게 문제였다. 결혼 후 2년이나 지나서 1964년 동아방송 성우 1기로 들어간다. 타고난 앳된 목소리가 재산이었다. 아기까지 딸린 엄마였지만 기혼임을 속이고 입사한 것이다.

진실게임은 오래 못 갔다. 어느날 교육 중에 누가 찾아왔다고 해서 나갔더니 어머니가 우는 아기를 들쳐업고 방송국에 찾아온 것이다. 화장실에서 문을 단단히 지키라고 당부한 후 젖을 먹이는데 동기생인 전원주가 갑자기 들이닥쳤다. 처녀가 젖을 먹이고 있으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누가 질렀는지 모를 비명소리에 동기생들이 밀려들었고 그녀의 연극은 막을 내렸다. 품성과 실력을 인정받은 덕분인지 다행히 그 무대에서 추방되지는 않았다.

성우 생활 1년 반 정도 지났을 때 처음 TV 드라마에 캐스팅됐다. 유호 극본, 황은진 연출의 '내 멋에 산다'였다. 이어서 '실화극장 124군 부대'에 소련 여자 나타샤 역을 가뿐히 해내 주목받는다. 배우로서 자신의 얼굴에 대해 그녀는 몇 점이나 줄까. "여러군데 쓸 수 있는 얼굴은 아니다." 그래서 배역도 늘 귀여운 할머니, 사랑스러운 고모, 말썽 많은 이모 등으로 제한적이었다. 그래도 불만은 없다. 자신을 제대로 써먹지 못한 연출가들의 안목이 안타까울 뿐이라고 능청스레 말하는 표정이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의 영락없는 귀여운 할머니다.

그녀가 지닌 연기철학의 화두는 뜻밖에도 '집념'이다. 사막에서도 땅을 파서 물을 떠먹을 수 있는 집념. 사극 '임금님의 첫사랑'에서 강화도 사투리를 배우려고 몰래 강화도까지 찾아간 일화는 유명하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오늘도 행복해야지'하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건다. 언제까지 연기할 거냐고 물으니 돌아오는 대답이 시원하다. "뽑힐 때까지." 누구에게 뽑히는(캐스팅) 것인지, 아니면 정열의 뿌리가 뽑힐 때까지를 말하는 것인지는 그냥 물음표로 남겨두기로 했다.

주철환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chjoo@ewha.ac.kr>
사진=신동연 기자 <sdy1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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