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재현 시시각각

가족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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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두 달 전 군에 입대한 아들의 첫 면회를 지난 주말에 다녀왔다. 28년 전 내가 졸병 생활을 하던 때가 생각났다. 다들 요즘 군대 좋아졌다지만 정말 그럴까. 매 맞지는 않는지, 배는 곯지 않는지, 면회 가는 길에 은근히 들던 걱정은 아이를 만나고 나서 씻은 듯 사라졌다. 구타는 생각도 못하고 식사는 자유배식이란다. 이등병도 병영 내 매점을 드나들 수 있다고 했다. 외출·외박에서 귀대할 때 선임병을 위해 떡이나 담배 등속을 바리바리 챙겨가는 관행도 진작에 금지됐단다. 소속 부대가 다른 사병끼리는 계급 고하에 관계없이 “아저씨”라고 부른다는 말을 듣고서는 솔직히 과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게다가 금연휴가라는 게 있어 담배를 끊으면 4박5일간 특별휴가를 얻는다고 했다. 대신 금연에 실패하면 정기휴가에서 4박5일을 토해내야 한단다. 요즘 군대, 정말로 좋아졌다.

그러나 아무리 좋아졌다 한들 군대는 군대다. 아들은 내가 도착해 면회 신청하는 순간을 아침부터 마음 졸이며 기다렸다고 했다. 외박 허락을 받아 데리고 나오면서 “뭘 먹고 싶니”라고 묻자 이등병이 말했다. “바깥 사회니까 아무 메뉴나 좋아요.”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만큼 ‘사제(私製)’가 그리웠다는 얘기다. 아마 군생활도 혹시라도 아비가 걱정할까 봐 좋은 얘기 위주로 풀어놓았으리라.

외롭고 힘들 때 우리는 가족을 생각하고 가족에 기댄다. 자식이 입대했다면 하루 빨리 만나러 가고 싶고, 면회 오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가족은 물과 같아서 평소에는 존재를 잘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표가 나는 법이다. 구성원 중 누가 멀리 가거나, 아프거나, 인생의 중요한 고비에 맞닥뜨리면 비로소 한가족임을 깨닫는다. 어제 치러진 대입 수능시험을 보라. 수험생들이 고사장 안에서 겪은 진통 못지 않게 고사장 밖 교회, 절집, 각 가정의 부모들도 자기 일처럼 스트레스 받아가며 정성을 쏟지 않았는가.

조어(造語)를 즐기는 일본인들은 가족 구성원이 사랑과 격려로 서로 북돋우고 난관을 헤쳐 나가는 능력을 ‘가족력(家族力)’이라고 이름 지었다. 우리는 보통 ‘가족애’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가족력은 ‘가족애가 발휘하는 힘’ 정도로 이해하면 될 듯하다. 일본 서점가에는 『미라클, 가족력!』 『가족력이 우울증에서 구원한다』 『수험 직전 45일 대책, 가족력으로 합격』 『가족력의 근거』 등 적지 않은 관련 서적이 나와 있다. 크고 작은 질병, 장애, 노부모 수발, 학교 가기 싫어하는 아이 등 가정 내 온갖 문제를 해결하는 첫걸음이 바로 가족력 강화라는 것이다. 나오키(直木)상을 받은 작가 야마모토 이치리키(山本一力·60)의 스테디셀러 『가족력』은 빚투성이에 생활이 방탕했던 자신을 끝까지 믿고 기다려 준 가족에 대한 고마움을 담은 자전적 에세이로 큰 화제를 모았다.

그러나 가족애든 가족력이든 내 부모, 내 자식만 싸고 도는 것으로는 뭔가 부족하다. 그런 가족이 모여 사는 사회는 ‘가족의 가족에 대한 투쟁’ 수준으로 전락해 버릴 것이다. 가족력을 발휘할 대상을 넓혀야 한다. 올겨울은 유난히 추울 게 뻔하다. 이미 추위가 시작돼 일자리부터 된서리를 맞았다. 불황 탓에 연탄 때는 집이 지난해보다 10%나 늘 것이라 한다. 몇몇 기업이 부도났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내년은 6년 만에 가장 낮은 경제성장률일 것이라는 예측이 추위를 더한다.

춥고 어려울수록 내 가정의 가족력을 점검하고 키우자. 핵심은 사랑과 믿음이다. 그러고 나서 가족력의 범위를 이웃과 사회로 넓히자.

올 연말 이웃돕기 모금 실적이 예년보다 못할 것이란 우려가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야멸치게 내 가족만 챙기는 건 가짜 가족력이다. 안도현 시인의 표현대로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시 ‘너에게 묻는다’)이어야 진짜 가족력을 갖춘 사람이다.

노재현 논설위원 겸 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