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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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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것은 돈 많은 신사들에 관한 이야기다. 그들은 거칠게 살고 교수형을 감수하지만 싸움닭처럼 호기롭게 먹고 마신다. 순항이 끝나면 그들의 호주머니는 푼돈 대신에 수백 파운드의 돈으로 두둑해진다. 그 돈의 대부분이 럼주를 마시고 즐기는 데 뿌려진다. 그러고는 셔츠를 걸치고 다시 바다로 나간다.”

한쪽 어깨는 늘 앵무새가 차지했던 키다리 선장 존 실버가 묘사한 해적들의 생활 방식이다. 세계아동문학전집의 단골 메뉴인 영국 소설 『보물섬』(로버트 스티븐슨)에 나오는 이야기다. 아닌 게 아니라 서양 소설이나 영화에서 해적은 미화되는 경우가 많다. 낡은 지도 한 장을 가슴에 품고 보물 상자가 묻힌 무인도를 찾아 항해하는 꿈은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진짜 해적들의 삶은 이와는 정반대로 비열하고 잔인했으며, 배신이 횡행하고 질병과 조난으로 단명했던 절망적 삶이었다(앵거스 컨스텀,『해적의 역사』). 법을 지키며 살아가는 현대 도시인과 반대되는 자유로운 행동을 대표하는 정서적 이미지를 해적에 덧씌웠을 뿐이라는 게 컨스텀의 결론이다.

해적은 매춘에 버금가는 오래된 직업이다. 매춘이 그렇듯, 인간의 항해술이 바다를 넘어 우주공간으로 향하는 시대에도 해적은 근절되지 않고 있다. 수에즈 운하와 이어지는 소말리아 인근 해역에서는 올 1월부터 9월까지만 63건의 해적 사건이 일어났다. 달라진 게 있다면 화물을 약탈하던 옛날 해적들과는 달리 선원을 인질로 잡아 몸값을 챙기는 게 주업이란 점이다.

며칠 전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소말리아 해적의 올 한 해 수입이 5000만 달러에 육박할 것이라고 추정했다. 20년 가까운 내전으로 피폐한 소말리아에선 몇 안 되는 호황 업종이라 할 만하다. 그러다 보니 호화 별장에 고급 외제차를 굴리는 해적은 젊은 여성이 신랑감으로 첫 손에 꼽는 선망 직업이 됐다고 한다.

한국 선박들의 해적 피해도 연례행사처럼 일어나고 있다. 지난달 한국 선박 브라이트 루비호는 피랍 36일 만에 풀려났다. 그나마 앞선 피해사례들에 비하면 빨리 해결된 셈이다. 급기야 정부가 해군 구축함과 대테러 요원을 현지에 보내 해적 퇴치를 위한 국제 연합해군에 동참할 계획을 추진한다는 소식이다. 그 옛날 동아시아의 해적인 왜구를 제압하던 위용을 다시 보여 주기 바란다.

예영준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