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가 고급 스테이크집 ‘텅텅’ 핫도그 노점상 줄은 두 배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6면

13일(현지시간) 오후 미국 뉴욕 7번가 745번지에 자리 잡은 당당한 위용의 32층 빌딩. 관광객이 북적이는 타임스스퀘어 바로 북단이건만 출입객이 거의 없어 왠지 스산했다. 파란색 대형 전광판에는 ‘바클레이즈 캐피털’이란 글자가 쉬지 않고 번쩍인다. 새 건물주의 이름이다. 그러나 묘하게도 한 달 전엔 “꿈이 이뤄지는 곳(Where vision gets built)”이란 몰락한 옛 주인의 슬로건이 노상 나왔다고 한다. 세계 굴지의 투자은행으로 군림하다 공중 분해된 리먼브러더스의 옛 본사다.

현관 경비원 조셉 크루진스키는 “정확한 숫자는 모르겠지만 파산 후 수많은 펀드매니저, 애널리스트가 짐을 싸 나갔다”며 “요즘엔 드나드는 인원이 확 줄어 활기가 사라졌다”고 한탄했다. 이 건물 앞에서 35년째 신문을 팔아 왔다는 리즈 윌리스는 “점심시간 동안 핫도그 노점상 앞 줄이 두 배는 길어졌다”며 “대신 리먼 직원들이 잘 가던 근처 고급 스테이크집 루스 크리스는 텅텅 빈다”고 말했다.

서브프라임 직격탄을 맞은 월가의 상징적 풍경들이다. 월가는 지난달 15일 리먼의 파산 이후 여러 의미에서 천지개벽에 맞먹는 격변을 겪었다. 우선 월가의 총아라던 투자은행들의 개념과 시스템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월가 유수의 투자은행 자산관리파트에서 일하는 H씨는 “밖에서 차입한 돈으로 공격적으로 투자, 몇 배의 이익을 챙겼던 좁은 의미의 투자은행은 더 이상 없어졌다”고 설명한다. 월스트리트 저널, 뉴욕 타임스 등 유수의 미 언론이 “전통적 의미의 월가는 이제 사라졌다”고 선언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인수합병, 주식 상장, 채권 발행 등과 관련된 투자은행의 다른 기능들은 계속될 수밖에 없어 금융 중심지로서의 월가는 존속하게 될 것”이라고 H씨는 전망했다.

유례없는 구조조정에 따른 대량 해고, 이직 등도 월가의 지형도를 바꾸고 있다. 파산 및 인수합병에 따라 각 직장에서 잘리거나 더 좋은 자리를 찾아 떠나는 직원이 수백, 수천 명에 이른다. 당장의 인사 태풍을 피했지만 합병된 투자은행 직원들도 마음을 놓지 못한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에 흡수된 메릴린치의 경우 내년 주총에서 양사 간 통합이 본격화되면 인원 정리가 불가피한 실정이다.

뉴욕=남정호 특파원

[이슈] 미국발 금융 쇼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