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리뷰>영화 "라이프 인 레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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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파벨 룽겐은 러시아의 일몰을 대상으로 데드 마스크를 뜬다.그회색 얼굴은 엄정한 계율과 맹목적인 충성을 지시한다.그러나 이면에는 잔인한 배신과 처벌의 원리가 차갑게 음각돼 있다.크레디트 타이틀과 함께 등장하는 한 에피소드에 영화의 주제가 상징적으로 응축됐다.
한 남자가 파파 앞에 불려온다.파파는 주문한다.나를 위해 네가 모시고 있는 이를 죽여라.그는 거부한다.어찌 몇십년간 이어진 우정과 신의를 저버릴수 있는가.영화가 말하려는 바는 이것이다.충성을 다하려는 인간과 배신을 사주하는 역사( 力士)의 대립.윤리와 의리를 사수한 끝에 그가 맞이한 것은 죽음이다.영화에 나타난 첫번째 죽음.
이건 러시아의 운명.그 발 앞에 드리워진 역사의 긴 그림자다.『라이프 인 레드』는 이 쓸쓸한 운명의 그림자를 살벌한 동화와 웃음기 없는 코미디 혹은 사랑의 대상이 뒤엉킨 러브 스토리와 초현실주의풍 갱스터 무비로 콜라주한다.
파파는 러시아 마피아의 대부.하지만 단순한 우두머리가 아니다.그는 이름 그대로 모든 이들의 「아버지」이자 가부장적 군주며작고 쪼글쪼글한 외모만큼이나 초라한 구세대를 상징하는 법이다.
또 상처를 마술적으로 치유하는 러시아의 신비스런 노인이다.흔들리지 않는 카리스마란 점에서 파파는 러시아 마피아의 공공연한 신이다. 그 신의 말씀을 터미네이터가 어긴다.보석때문에.그래서그는 땅 속에 파묻혀 축구공처럼 발로 걷어차인다.두번째 죽음이다.세번째는 국경지대의 노인.그는 지폐뭉치를 받고 옥산나를 이스탄불의 매음굴에 팔아 넘긴다.이들의 배신은 자본주의적 유혹의산물인 것이다.파파는 이 대세를 역류하려 하지만 실패한다.자신또한 돈을 위해 사기극을 꾸민 연출자,모순된 율법사가 아닌가.
그러니 그의 흔들림은 이미 예정된 일이다.필립과 옥산나가 환락의 파라다이스 물랭 루주로 도피했을 때 파파는 굳이 이들을 잡으려 하지 않는다.철통 같은 금연법을 해제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자신의 법을 자기가 어긴 것이다.그의 심복은 이에 불복한다. 그래서 파파 같은 허수아비 옷걸이를 저격한 다음 마침내 자기 관자놀이에 대고 방아쇠를 당긴다.변화하는 세상,변화하는 법칙에 적응못한 러시아 마피아의 말로는 가엾다.
이제 다섯번째 죽음은 파파의 운명이다.그는 사라져가는 제국의옛 이상과 규칙을 온몸으로 살았다.감독은 러시아의 손바닥에 그려진 다섯 죽음의 생명선(라이프 인 레드)을 이런 식으로 관객에게 펼쳐보인 것이다.
김정룡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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