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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엔 한자 성어, 식탁과 거실 탁자 위엔 세계지도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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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전담선생님 댁에 방문했을 때 일이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뒤늦게 영어에 푹 빠지셨다는 선생님께서는 용변을 보는 시간도 아까워 화장실에서도 영어 단어를 외우다보니 좌변기 위에 단어장을 놓고 오는 경우가 수도 없이 많았다고 하셨다. 그러다보니 화장실 한켠에 단어장과 영어책은 쌓였고 자연스럽게 자녀들도 용변을 보러 화장실에 갔다가 한 번씩 단어장을 들춰보고 영어 단어를 읽어보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선생님댁 아이들도 영어 단어를 외우기 위해 책상에 앉아 지겹도록 반복하여 영어 단어를 암기하는 시간이 줄고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여 공부하는 습관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이 시험 준비기간이 되면 냉장고와 화장실에 잘 외워지지 않는 단어나 틀린 문제 등을 종이에 적어 붙여놓는 특이한 습관까지 생겼다고 한다. 은연중에 환경의 변화를 활용하여 단기기억을 장기기억으로 만들어주는 학습법을 습득하게 된 것이다. 덕분에 선생님 댁 자녀들의 사회과와 영어과 성적이 많이 올랐다고 하셨다.

학습 환경에 변화를 주어가며 짧은 단위의 단순 지식을 반복적으로 학습하는 것은 학습 능률을 올리는 데 효과적인 방법이다. 가정에서는 화장실과 냉장고 앞, 화장실 앞, 거울 앞 등 아이 눈이 자주 머무는 곳에 작은 공간을 마련하여 아이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학습할 수 있게 해준다면 아이들에게는 재미있는 학습 습관 한 가지가 생기는 것이다.

◇ 화장실 한켠에는 한자 성어나 영어 단어를

한 때 ‘화장실에서 신문읽기, 화장실에서 책읽기’ 붐이 일었던 적이 있다. 자연스레 정치, 경제, 문화 등에 관한 상식을 많이 얻을 수 있어 좋긴 하지만 신문을 읽는 동안 화장실에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져 변비와 같은 배변습관이 생기는 단점이 있어 요즘은 신문을 화장실에 놓고 읽는 것을 권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자와 사자성어를 붙여놓는 것은 다소 다르다. 신문처럼 읽어야할 내용이 많거나 오랜 시간 집중하여 정독할 필요가 없다. 짧은 시간 한번 읽어 보는 것만으로도 아이는 충분히 그 글자와 익숙해질 수 있다. 반드시 외워야한다는 부담 대신 자연스럽게 눈에 익히기만 해도 좋다. 같은 맥락에서 초등학교 계단을 오르다보면 층마다 해당 학년에서 알아두면 좋을만한 사자성어가 계단과 계단 사이에 붙여져 있다. 계단을 오르면서 한자를 반복해서 읽다보면 이후 층계에서 읽었던 한자들을 재량한자 시간에 만났을 때 쉽게 내 것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생활 속의 반복 학습만큼 쉬운 공부법은 없다.

◇ 식탁과 거실 탁자 위에는 세계 지도를

생활 속에 학습법 중 또 다른 추천할 만한 것은 식탁이나 거실 테이블 위에 세계지도를 붙여놓는 것이 있다. 우리나라 지도나 아이가 흥미를 가지고 있는 국가의 지도를 붙이는 것부터 시작하자. 아이가 축구를 좋아한다면 월드컵 출전 대표 팀들이 표시된 지도도 좋다. 서점에 가서 저렴한 가격에 얇은 종이로 된 다양한 지도들 중 맘에 드는 것 한 장을 구입하자. 코팅이 된 것은 지도 위에 메모하기도 불편하고 접히지 않아 휴대가 불편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권하고 싶지 않다.

지도를 붙여 놓고 ‘지도를 붙여 자주 보는 것이 좋다고 하니 이것 좀 봐봐.’라며 지도만 붙여놓고 끝낸다면 시각적으로 집을 지저분하게 만드는 것이 될 뿐 교육적으로 아무런 효과가 없다. 그러므로 지도의 올바른 활용법이 중요하다.

지도의 활용법은 매우 다양한데 한 가지만 예를 들어보면 교육방송과의 연계하여 활용하는 방법이 있다. 지도를 펼쳐놓고 (본방송) 월-목 밤 8:50-9:30, (주말종합편) 일요일 낮 12:00-14:40 (4편 연속 방송)에 아이와 함께 앉아 EBS채널에서 방영되는 ‘세계테마기행’을 같이 보는 것이다.

세계테마기행은 단순한 여행 정보 프로그램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배낭여행자만이 느낄 수 있는 살아있는 체험기를 전하고자 기획된 프로그램이다. 스페인에서 칠레, 남아공에서 알래스카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를 직접 발로 뛰며 제작되기 때문에 찬란한 문명 유적지와 자연유산은 물론 다양한 방식으로 삶을 영위해 가는 세계인들의 숨은 일상까지 생생히 느낄 수 있다. 매 편 여행을 안내하는 큐레이터들은 한국인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이 시대 우리에게 필요한 세계관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기 때문에 시간에 맞추어 채널만 돌려준다면 특별한 준비 없이 아이와 지도를 펼쳐놓고 방송을 보며 많은 대화가 가능하다.

세계테마기행-캄보디아편을 보면서 아이들과 세계지도에서 캄보디아를 찾은 후 수도를 찾고 방영이 되는 동안 여행자가 이동하는 도시들을 빨간색 펜으로 화살표 표시를 하면서 여행자의 동선을 만들어보자. 이 때 TV를 본 날짜와 여행자의 ‘여행 제 O일째'라는 일정도 옆에 기록해 주면 사회와 역사과와 관련한 다양한 학습 자료들을 매우 즐겁게 탐험해볼 수 있다. 또한 그 후에 교실에서 세계사와 세계지리과 관련 공부를 할 때 수업 내용이 머리에 쏙쏙 들어와 보통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사회과에 대한 두려움 없이 적극적인 태도로 교과 수업에 참여하게 될 것이고 무조건 ‘사회과는 무조건 암기해야 한다.’는 부담도 줄어들 것이다. 이 외에도 내셔널 지오그래픽이나 e-지식채널에서 방영되는 프로그램들 중 학업에 도움이 되는 것들이 많으니 지나치기만 했던 해당 채널 방영 시간표를 살펴보자.

지금 당장 서점으로 가자. 너무 작은 지도보다는 식탁만큼 큰 크기의 지도를 사자. 아이들이 자유롭게 기록할 수 있는 여유 공간이 있는 지도를 사자. 색칠이 되어 있지 않은 백지도를 구입하여 직접 꾸며가며 지도를 만들어가는 것도 좋다. 금전적 여유가 있다면 지구본도 하나 구입하여 지도 옆에 두자. 그러나 지도 없이 달랑 지구본만 구입하는 것은 초등학교 수준의 아이들에게는 신나게 돌리고 놀 수 있는 장난감 이상의 의미가 없으니 바람직하지 못 하다. 생활 속에 익숙해지는 학습만큼 재미있고 쉬운 공부법은 없는 것 같다.

김범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