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민 발음 부담 버리고 표정에 감정 담아 말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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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태희라는 학생이 연구실로 찾아 왔다. 태희는 초등학교 때부터 영어학원을 다녔고, 고교 때까지 영어를 가장 좋아해 영문과를 지원한 학생이다. 그런데 대학교에 와서 처음부터 다시 영어 말하기를 공부해야 한다고 걱정이 태산이었다. 태희의 소원은 원어민이나 재미교포처럼 사람들 앞에서 영어로 말해보는 것이라고 했다.

학생들과 상담을 해보면, ‘원어민처럼’이란 말을 정말 자주 한다. 분명한 발음으로, 문법 걱정 없이, 속사포처럼 거침 없이 말하고 싶어 한다. 예전에 네티즌이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히딩크 축구 감독의 영어를 비아냥거린 인터넷 댓글을 본 적이 있다. 아마도 그들이 영어를 잘하고 못한다고 하는 평가엔 분명 이 같은 기준이 숨어 있었을 것이다. 원어민 영어에 비해 너무나 ‘비원어민 같은’ 영어는 그저 싫은가 보다. 주변에 보면 원어민과 비원어민을 대비시키며 영어 공부시키는 곳이 아직도 참 많다.

이걸 기억하자. ‘원어민다움(nativeness)’에 집착하면 비원어민은 언제나 열등하다. 원어민 기준점은 비원어민의 영어 말하기 공부를 힘들게 만든다. 10년을 공부해도 무지개처럼 화려해 보이는 원어민 영어는 절대 잡히지 않는다. 대화도 좋고 스토리텔링도 좋고 발표나 토론 공부도 좋다.

그런데 혹시 지금 배우고 있는 영어가 학생들의 마음을 위축시키는 원어민 영어가 아닌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외국어인 영어로 말하기를 잘하려면 원어민 영어에 대한 부담감을 먼저 내려 놓아야 한다. 그리고 말하기 기술부터 배워야 한다. 말을 걸고 싶은 사람, 말을 주고받고 싶은 매력적인 사람이 먼저 돼야 한다. 상대방의 눈을 맞추고 말하는 연습부터 해보자. 표정은 밝게 매력적으로 웃으면서 말하는 연습을 하자. 이야기 내용이 길다면 복잡한 구문은 쓰지 말고, 짧고 감당할 만한 문장을 하나씩 만들면서 이야기의 흐름에 집중하자. 자신의 감정을 전하기 위해 목소리는 높게, 얼굴 표정이나 몸이나 손동작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자.

말문이 막히면 한국어 단어도 쓰고 주변의 도움도 구하자. 주변에 보이는 것을 손짓으로 가리키며 말하자. 상대방이 지루해하는 듯하면 질문을 던져 한 호흡 쉬어가며 상황을 살핀다. 평소 상대방이 기대감을 가질 수 있는 이야기 소재를 늘 수첩에 적어두고서 수시로 말하는 연습을 해보자. 비원어민이지만 매력적이고 당당한 모습 아닐까.

원어민과의 소통은 필요하다. 하지만 원어민 영어는 무지개다. 원어민 기준에 관대해지고 말하기 기술부터 공부하자. 모국어로 말하는 기술이 부족한데 영어로는 거뜬하게 잘하는 학생은 거의 없다.

신동일 중앙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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