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德惠翁主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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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1963년 11월22일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은 부인 방자(方子)와 함께 영구 귀국했다.1907년 10세 어린 나이로 일본에 볼모로 끌려간지 56년만이었다.이보다 한해 앞선 62년 1월26일 또 다른 볼모 한 사람이 돌아와 있었다.비운의황녀(皇女) 덕혜옹주.정략의 희생물로 37년동안 혹독한 삶을 살았던 그녀가 드디어 고국 품에 안긴 것이다.귀국할 당시 그녀는 도쿄(東京)의 한 정신병원에 입원중이었다.
덕혜옹주는 1912년 태어났다.엄비(嚴妃)가 세상을 떠난 후고종은 상궁 양(梁)씨를 총애해 옹주를 낳았다.양씨는 귀인(貴人)에 책봉돼 복녕당(福寧堂)이란 당호(堂號)를 얻었다.고종은노년에 얻은 옹주를 애지중지했다.거처인 덕수궁 가까이 왕실 유치원을 세워 옹주를 다니게 하고 시간이 나면 유치원에 들러 옹주가 뛰노는 모습을 보곤 했다.옹주 나이 7세때 고종이 승하(昇遐)하자 후손이 없던 순종은 옹주를 친딸처럼 돌봤다.
옹주가 13세 되던 1925년 일제는 옹주의 일본유학을 주선했다.황족은 일본에서 교육받아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그러나 어린 옹주는 이국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신경쇠약에 시달렸다.특히 17세때 생모 양귀인이 세상을 떠나자 증세는 더욱 심해졌다.의사 진단은 조발성(早發性)치매였다.얼마후 병세가 호전되자 옹주 나이 19세 되던 1931년 일제는 쓰시마(對馬島)번주(藩主)아들 소 다케시(宗武志)백작과 정략결혼시켰다.그러나 애정없는 불행한 결혼이었으며,1955년 이혼으로 끝났다.특히 딸 마사에(正惠)마저 결혼에 실패하고 현해탄에 몸을 던짐으로써 옹주의 절망은 극에 달했다.
서울에 돌아온 옹주는 서울대병원에 입원,5년동안 치료받았으나별로 나아지지 않았다.퇴원후 옹주는 창덕궁 낙선재(樂善齋) 한쪽 수강재(壽康齋)에 칩거(蟄居)했다.한달에 두번 왕진오는 의사 말고는 1년 내내 방문객 한사람 없는 고적( 孤寂)한 생활이었다.이따금 정신이 들면 먼저 간 딸 마사에를 부르곤 했다.
89년 4월21일 옹주는 세상을 떠났다.경기도 금곡 홍유릉(洪裕陵)에 묻혔다.
MBC-TV는 올해 8.15특집극으로 덕혜옹주 일생을 다룬 『덕혜』를 방영한다.망국의 황족으로 태어나 비극적 일생을 살았던 그녀의 생애를 돌아보는 기회가 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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