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제징용노임 되찾기 나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0면

일제시대에 일본군에 징발돼 노역을 했던 대구.경북지역 징용자들이 당시 일본군이 작성한 명단을 입수,받지 못한 노임찾기에 나섰다.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경산군지부((053)962-0764)심재언(沈在彦.76)고문은 지난 4월 대구.경북 징용자 3천여명의 인적사항이 적힌 책자를 입수하고 못받은 노임을 돌려받기 위해 당시 동료들을 모으고 있다.
沈씨가 일본에 끌려간 것은 24세이던 1944년 7월.징용을피해 도망다니던 沈씨는 『아버지를 대신 데려가겠다』는 일본군의협박에 못이겨 모집일(7월1일) 아침 대구연병장으로 나갔다.
경북 각지에서 끌려온 3천여명은 즉각 일본 선박군(船舶軍) 4개중대(101~104중대)로 편성됐다.일본군 지휘관은 『여러분들의 집으로 매달 80~1백20원의 봉급을 송금하겠다』고 「약속」했다.쌀 한가마 값이 5원이던 당시로는 큰 돈이었다.
높이 1가량의 화물칸에 짐짝처럼 실려 7월26일 부산항을 떠난 징용자들은 약 보름만에 오키나와(大阪)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이들은 진지구축.도로작업등 끝없는 노동에 시달리다 45년 1월말에는 인근 게림마(慶良)열도의 작은 섬들로 분산돼노역을 계속했다.일본의 패색이 짙어가던 3월26일 게림마열도가미해군에 점령당하자 징용자들은 하와이와 오키나 와의 포로수용소로 이송됐다.
그리고 46년 3월2일 꿈에도 그리던 조국땅을 1년9개월만에다시 밟았다.악몽의 시간을 잊으려고만 했던 이들은 79년 징용중 일본군에 학살된 동료들의 위령탑을 오키나와에 건립하면서부터생각을 바꿨다.
『말뿐이었던 일본군의 「약속」을 뒤늦게라도 이행시켜 동료들의한을 풀어주자』고 뜻을 모으고 한국.일본 양국의 각계각층에 도움을 청했다.
沈씨는 올해초 일본의 한 단체로부터 믿기지 않는 연락을 받았다.『일본정부에서 93년 한국정부로 오키나와 징용자들의 명단을건네줬고,한국정부의 공식요청이 있으면 일본정부에 공탁돼 있는 노임을 찾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로부터 3개월후 沈씨는 정부기록보존소에서 자신의 인적사항과공탁번호가 기록돼 있는「선박군 명부(사진)」를 두 눈으로 확인하게 됐다.沈씨는『현재까지 약 4백여명의 동료들을 찾아냈다』며『1천명 가량 모이면 외무부를 통해 정식으로 일 본에 못받은 노임을 요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외무부 당국자는 『이미 65년 한.일외교수립 당시 보상금문제를 마무리했기 때문에 이제와서 미지급 노임을 요구하는 것은 어렵다』고 밝혔다.
대구=강주안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