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 속 일상을 체험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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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이를 오늘처럼 믿고 따랐던 적이 없었어요.” “27년 인생 속에서 가장 편안한 순간이었어요.”어둠이 두렵고 무섭다고? 이곳에선 선입견일 뿐이다. 시각을 닫으면 보이지 않던 또다른 세상이 열린다.


볼 수 없는 전시

신촌 아트레온 13층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어둠 속의 대화’는 아주 색다른 체험전이다. 케인(시각장애인용 지팡이)을 손에 쥐고 전시장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자신의 손조차 보이지 않는 완전한 어둠’이 버티고 선다.

눈을 감거나 뜨거나 의미가 없다. 두려움과 호기심으로 뒤범벅이 된 감정을 추스려주는 것은 전시 가이드의 나지막한 목소리다. “효진씨, 소리나는 쪽으로 세 걸음 더 오세요.” “현민씨, 천천히 움직이셔도 돼요.”

발걸음이 무뎌질 때마다 이름을 불러주고 손을 내밀어 이끌어주는 전시장 가이드는 시각장애인이다. 관람시간 동안 이곳에선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입장이 뒤바뀐다.

가이드의 말소리와 케인에 의지해 체험하는 공간은 공원과 거리·시장·카페 등 4곳. 시각을 닫고 들어선 곳이 공원임을 먼저 알아채는 것은 후각이다. 고무나무와 대나무를 구별해내는 것은 촉각이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흐르는지 감지해내는 것은 청각이다.

지팡이로 옆 사람을 툭 치고, 손으로 앞 사람의 어깨를 더듬는 일쯤은 다반사. 불쾌감보다는 공간에 함께 있다는 ‘안도감을 주는 접촉사고’다.

경적 소리가 요란한 거리에선 버스와 자동차·오토바이 소리를 정확히 구분할 정도로 청각이 예민해진다. 시끌벅적한 시장 안에선 촉각 만으로 장바구니를 채울 자신이 생긴다. 주문하는대로 음료수를 척척 내주고 거스름 돈까지 깔끔하게 처리하는 카페지기 앞에선 잠시 겸손해진다. 이들 역시 시각장애인이다. “하나의 감각을 닫으면 다른 감각이 열린다는 것을 알았어요. 잠자고 있던 내 안의 감각들을 새로 발견하는 느낌이에요.”(조건·33·서울시 화곡동) 체험시간은 1시간 15분 정도. 문의 02-525-4120

 
어둠 속 미각 여행

“스테이크의 뒷맛이 오래 남네요.” 4일, 레스토랑을 찾은 이병화(28·서울시 용두동)씨는 “1시간 반 동안 어둠 속에 함께 머문 옛 직장 동료와 좀더 가까워진 것 같다”고 했다.

지난해 10월 문을 연 ‘왕의 남자’는 빛이라곤 전혀 없는 어둠 속에서 미리 주문한 요리를 즐기는 레스토랑이다. 웨이터의 어깨에 손을 얹고 예약된 자리에 앉으면 수프·샐러드·메인요리·후식이 차례로 제공된다. 늘 하는 식사지만 이곳에선 간단치 않다. 요리가 나올 때마다 그에 맞춰 스푼과 포크·나이프를 일일이 손으로 더듬어 찾아내는 것부터 일이다.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하는 것도 어설프다. 바닥에 떨어뜨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요리의 온도를 감지하고 어떤 요리인지 알아내기 위해 후각과 미각이 곤두선다. 요리를 정확하게 입안에 가져가기 위해 손에 힘이 들어가고 몸은 테이블 쪽으로 기운다.

“환한 공간이었으면 우스꽝스러웠을 자세죠. 보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니 편했어요. 미각이 발달한 편이 아닌데 오늘은 고기가 덜 익었는지, 너무 익었는지까지 세세하게 느껴지던 걸요.” (조윤정·25·서울시 여의도동) 이곳에서 미각과 더불어 예민해지는 것은 청각이다. 상대방의 목소리에 귀가 쏠린다. 예약제로 운영. 문의 02-497-5248(오후 3~12시)
 
 
프리미엄 김은정 기자
사진= 프리미엄 황정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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