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구의 역사 칼럼] “하늘서 받은 성품에 남녀 차이는 없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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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호 35면

지난번 칼럼에서는 강정일당(1772~1832)의 신념만을 너무 강조했다. 사실 강정일당은 조선 여성사에서 찬찬히 기억될 만한 인물이다. 조선시대에 여성으로 문집(『정일당유고(靜一堂遺稿)』)을 낸다는 것은 보통 의미가 아니다.

정일당은 어깨 너머로 공부한 사람이다. 20세에 14세의 윤광연과 혼인했다. 여섯 살은 당시로서도 적은 나이 차는 아니었다. 왜 이렇게 과년한 나이에 어린 사람과 결혼하게 됐는지는 기록에 잘 나와 있지 않다. 혼인 후 이들 부부는 가난했다. 정일당은 늘 삯바느질을 해야 했다. 그러니까 여자는 삯바느질하고, 남편은 공부하고. 드라마에 나올 법한 빈궁한 양반 부부의 모습이다.

이런 어려운 처지에서도 강정일당은 삯바느질하는 데만 머물지 않았다. 아니 ‘머물지 못했다’는 게 더 옳은 표현일 것이다. 정일당의 지칠 줄 모르는 학문에 대한 호기심이 끊임없이 남편 공부를 넘겨다보게 했다. 그녀는 종종 남편을 졸랐다. 같이 토론하자고. 또는 모르는 게 있으니 스승님께 물어봐 달라고.

“『중용』의 ‘계신공구(戒愼恐懼)’를 주자는 ‘항상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둔다’고 해석하였으니, 이는 ‘동(動)’과 ‘정(靜)’을 통용하여 말한 것입니다. 또 ‘존양성찰(存養省察)’로 말한다면 ‘계신공구’는 전적으로 ‘정’에 속할 것 같은데, 어떻게 봐야 마땅하겠습니까?”

어려운 질문이다. 남편의 스승 송치규는 자세히 답을 한다. 문답의 내용을 다 파악할 수는 없지만, 정일당의 왕성한 지적 욕구와 그를 존중하는 송치규의 태도는 엿볼 수 있다.

강정일당의 글 중 상당수는 제목 뒤에 ‘대부(代夫)’라는 말이 붙어 있다. 남편 대신 지었다는 뜻이다. 조선시대에는 서로 글을 주고받을 일이 많았다. 친구네 집 것은 우리 집이 쓰고, 우리 집 것은 친구네 집에서 쓰는 식이다. 정일당 남편도 그런 식의 부탁을 많이 받았던 모양이다. 윤광연은 자신보다 부인 글 솜씨가 낫다고 생각한 것일까? 정일당이 대신 쓰게 한 일이 빈번했다는 증거다. 행장이나 묘지명만이 아니다. 남편 편지도 대신 쓴 경우가 많았다. 이런 편지의 말미에는 버젓이 윤광연의 이름이 있다. 조선시대에 여자가 남편과 이런 관계 속에 글을 썼다는 사실이 재미있다. 어떤 연구자는 윤광연을 ‘조선시대 페미니스트’라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정일당이 여성사에 기억되어야 할 진짜 이유는 다음에 있다. “윤지당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비록 부인이지만, 하늘에서 받은 성품에는 애당초 남녀의 차이가 없다’ 하셨습니다.” 임윤지당(1721~93)은 정일당보다 먼저 산 여성 성리학자다. 정일당이 그 영향을 받고 있다. 여자들도 ‘성인’이 되고자 하는 노력은 오랫동안 계속해 왔지만 학문적으로 이론화되고 또 그 생각이 공유된 적은 별로 없다. ‘성품에 남녀의 차이가 없다’는 말은 남녀가 역할은 달라도 인간 자체로는 같다는 얘기다. 여자들에게 상당한 자신감을 주는 말이 아닌가. 강정일당은 여자들의 사고영역을 넓혀주는 데 크게 일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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