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칼럼>관철동시대 67.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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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0면

한국기원은 94년10월5일 관철동을 떠나 홍익동으로 이사했다.26년전 한국기원이 떠돌이 시대를 청산하고 처음 이곳에 정착했을 때 관철동은 아직 고적한 뒷골목이었다.바둑꾼들은 촌색시처럼 가슴 설레며 이곳 저곳 헤집고다니면서 술을 퍼 마셨다.
마작을 좋아하던 백욱태4단은 폐병에 걸렸으면서도 계속 마작을하다 30대에 요절해버렸다.동료 프로들은 그의 관속에 마작을 한벌 넣어야 한다고 슬퍼하며 또 술을 마셨다.가난했으므로 서봉수는 명인이 돼서도 자장면만 먹었다.조훈현은 지 금은 아예 술을 입에 대지 않지만 그때는 주모가 강권하면 쓰러질 각오로 한잔은 마셨다.노름도 좋아했다.밤을 꼬박 새우고와서 대국중에 꾸벅꾸벅 조는 기사도 있었다.
지금은 그 시절의 분위기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프로들은 이제 술도 거의 마시지 않고 노름도 하지 않는다.젊은 기사들은아예 담배조차 피우지 않는다.
『진짜 승부세계가 되었지요.체력을 비축하고 꾸준히 공부한 다음 전력을 기울여 싸워 이기는,완벽하고 무서운 시대가 됐어요.
』 관철동시대는 사실 엉망이었다.「승부」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뒷골목과 허름한 여관,감자국집의 술판으로 점철된 이 시대는 도저히 승자의 시대가 아니었다.
한국바둑은 그러나 이곳에서 장미꽃을 피워냈다.89년 조훈현이처음으로 세계를 제패하더니 93년과 94년엔 이 기간에 열린 8개의 세계대회를 모조리 휩쓸었다.
에어컨은 언제나 덜덜거리고 대국때면 거리의 번쩍이는 네온과 소음때문에 문을 꼭꼭 닫아야 했지만 그래도 이곳 관철동은 바둑꾼의 가슴을 자극하는 이상한 힘이 있었다.앞으로 바둑계가 얼마나 더 발전할지 알수 없지만 관철동시대의 영광을 재현하기는 아마도 힘들 것이다.그이상 따뜻한 팬들의 환호도 받기 어려울 것이다. 수많은 문인과 철학자들.애호가들이 곁에서 승부를 지켜봐주던 시대는 그렇게 끝났다.
홍익동의 넓은 새 건물에서 화려한 기념식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조훈현은 현재현 한국기원이사장으로부터 세계바둑계를 평정한 공로로 순금으로 된 행운의 열쇠를 받는다.그러나 그해 겨울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훈현은 제자 이창호에게 모든 타이틀을 잃고 만다.다시 1년쯤 흐른 95년12월,진 로배 1라운드가 열리고 있는 도쿄(東京)의 일본기원에선 이창호7단과 한 소녀가 이색적인 대국을 벌이고 있었다.그 주위에선 조훈현9단과김인9단,그리고 고바야시 고이치(小林光一)9단이 화기애애하게 구경을 한다.소녀의 이름은 고바야시 이즈미.고바야시9단의 딸인데 얼마전 프로가 됐다.일본 바둑계를 거의 10년간 석권했던 고바야시도 「명인」마저 빼앗겨 막 무관이 된 상태.그러나 이창호를 보자 욕심(?)이 생겨 조훈현에게 딸의 지도기를 정중히 부탁했고 그 대국을 보며 만사를 잊고 흥겨워하고 있었다.
유명한 기타니(木谷實)의 딸이자 고바야시의 부인인 레이코8단도 사진을 찍으랴,먹을 것을 갖다놓으랴 신바람이 나있었다.
도쿄든 베이징(北京)이든 어디를 가도 이창호는 스타이자 왕자다.아직 결판이 나지 않았음에도 모두들 그렇게 인정한다.그러나스승 조훈현9단은 아직 만족하지 못한다.曺9단은 스스로 궁금해하는 것같다.『젊은 조훈현과 이창호가 대결하면 과연 승부가 어찌 날까.』曺9단은 아마 자기쪽에 걸고 싶을 것이다.한달 전쯤일까.曺9단이 『나하고 똑 닮은 녀석을 발견했다』며 약간 흥분하고 있었다.광주에 사는 일곱살짜리 소년인데 3점에 대국했던 모양이다.『글쎄,나보다 더 빨리 두더라 니까.』조훈현은 그 소년을 키우고 싶어했다.
관철동시대는 끝났지만 승부는 계속된다.그토록 강인하던 승부사들의 눈에서 불꽃이 사라지는 것은 어쩔수 없는 세월 탓이라 해도 비감한 느낌을 준다.그렇더라도 바둑계에서 관철동시대는 대단했다.바닥 에서 기어올라 세계를 제패한 그들은 멋쟁이고 영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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