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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바닥을 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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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지난 주말 자전거를 타다 비탈길에서 그만 굴렀다. 바람에 날리는 모자를 잡겠다고 한 손을 핸들에서 놓은 것이 실수였고, 속도를 줄인답시고 나머지 한 손으로 살짝 브레이크를 잡은 것이 더 큰 실수였다. 결국 자전거가 ‘휙’ 돌면서 나는 반대편 찻길에 나뒹굴고 말았다. 팔꿈치·가슴·이마가 차례로 아스팔트 바닥을 쳤다. 나는 용수철 퉁기듯 일어나 얼굴을 감쌌지만 코와 입술 사이의 인중과 턱에서 피가 흐르고, 이마는 주먹만 한 크기로 부어올랐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정말이지 이러다 가는구나 싶었다.

#애써 몸을 추스르고 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가슴과 머리 등 골절이 의심되는 곳의 X선 사진을 찍고 폐와 심전도를 체크했다. 외관상 ‘중상’이었지만 다행히 골절은 없었다. 응급 조치를 끝낸 후 침대에 누우니 바닥에 나동그라지는 장면이 영상처럼 반복해 떠올랐다. 맨몸이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진다는 것은 분명 섬뜩하고 아찔한 일이다. 하지만 삶 자체가 바닥을 치는 것은 그보다 더한 일이다.

#지난 5일 미국 하버드 대학 졸업식에서는 ‘해리포터’ 시리즈의 작가 조앤 롤링이 졸업 축사를 했다. 그녀는 성공의 상징처럼 보이는 하버드 졸업생에게 “삶의 가장 밑바닥이 인생을 새로 세울 수 있는 가장 단단한 기반”이라고 말했다. 조앤 롤링은 대학을 졸업하고 7년 동안 엄청난 실패를 겪었다. 결혼에 실패한 ‘싱글 맘’의 삶은 너무 곤궁했고, 추락은 끝없이 이어졌다. 아무리 노력해도 꿈쩍 않는 삶의 질곡 속에서 그녀는 그 끝없는 추락을 끝내고 싶은 나머지 자살을 시도했다. 하지만 삶이 모진 만큼 살고자 하는 욕망 또한 질기게 마련이다. 특히 어린 딸을 놔두고 죽을 수 없었기에 그녀는 바닥을 치고 다시 일어섰다.

#다시 살기로 작정한 그녀는 자신을 독하게 추슬러냈다. 친구로부터 600파운드를 빌려 세든 에든버러의 낡고 허름한 임대아파트에서 우울증과 싸우며 이야기를 써내려 갔다. 마법소년 해리포터의 이야기였다. 물론 생활고를 이겨내기 위해 쓰기 시작한 것이었지만, 한편으론 동화책 한 권 사줄 수 없는 형편에 스스로 어린 딸에게 해줄 이야기를 쓰는 엄마가 되기로 작정한 까닭도 있었다. 조앤 롤링은 우는 아이를 재워두고 혹은 유모차에 태워 집 앞의 카페나 공원에 가서 글을 쓰며 ‘해리포터’ 시리즈의 첫 권인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을 탈고했다. 그녀의 ‘해리포터’ 시리즈는 1997년 6월 26일 출간되자마자 세상을 뒤흔들었다. 마치 마법처럼.

#끼니를 걱정해야 했던 조앤 롤링은 ‘해리포터’ 시리즈의 대박으로 자그마치 5억4500만 파운드, 한화로 약 1조850억원의 거부가 됐다. 그녀는 포브스지 선정 세계부자 순위 500위권에 올랐고, 영국 여왕보다도 더 큰 부자가 됐다. 하지만 그녀가 하버드 졸업식장에 서서 축사를 할 수 있었던 진짜 자격은 대박을 낸 작가이거나 억만장자가 됐기 때문이 아니다. 바닥을 치고 일어섰기 때문이다. 그녀는 성공신화로 무장한 채 바닥칠 일은 아예 없어 보이는 하버드 졸업생에게 진짜 성공하고 싶거든 바닥을 치고 일어서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과 정부의 추락이 끝없어 보인다. 하지만 아직 멀었다. 완전히 벌거벗고 바닥의 바닥까지 더 내려가야 한다. 허튼 날갯짓이나 괜한 발버둥을 칠 필요도 없다. 깨끗하게 바닥을 쳐라. 그래야 다시 일어선다. 소싯적에 바닥친 경험으로 얼버무리거나 바닥치지 않겠다고 버티는 것이 되레 문제다. 과거의 성공신화, 청계천의 녹슨 훈장도 죄다 내던져라. 자만과 독선일랑 땅에 파묻고 맨땅에서 다시 할 각오로 해라. 그래야만 한다. 바닥치면 무서울 게 없다. 세상에서 가장 센 것은 바로 바닥친 사람이니까.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