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천득 선생 추모시비 제막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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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25일 열린 피천득 1주기 추모식에서 심명호 서울대 명예교수를 비롯한 제자와 지인들이 시비를 제막하고 있다. [샘터사 제공]

금아(琴兒)의 시비는 그리 크지 않았다. 가로 120cm, 세로 70cm의 검은 돌에는 그의 시 ‘너’가 새겨져 있었다. 금아가 가장 아꼈다는 시다.

‘눈보라 헤치며/ 날아와//눈 쌓이는 가지에 나래를 털고//그저 얼마동안/앉아 있다가//깃털 하나/아니 떨구고//아득한 눈 속으로/사라져가는/너.’

25일은 수필가이자 시인, 영문학자였던 금아 피천득(1910~2007)이 떠난 지 1년이 되는 날이다. 이날 오후 그가 잠든 경기도 남양주 모란공원에서는 시비제막식을 겸한 추모식이 열렸다. 추모식 제목은 ‘사랑하다 떠난 이’였다. 금아는 수필 ‘만년’에서 “훗날 내 글을 읽는 사람이 있어 ‘사랑을 하고 갔구나’하고 한숨지어 주기를 바라기도 한다. 나는 참 염치없는 사람이다”라고 적었다.

추모식에는 유족과 지인 100여명이 참석해 ‘사랑하다 떠난 이’를 기렸다. 둘째 아들인 피수영(65) 울산대 의대 교수는 “아버님은 미물에게도 아낌없는 애정을 쏟으셨고 그 애정에서 비롯된 아름다운 글들을 남기고 가셨다”고 추도했다. 김남조 시인은 “애도와 추모의 심정으로 선생님의 조소작품 둘레에 기죽은 아이들처럼 모여 서 있다”며 “소박하면서 풍요롭게 살고 가신 선생님과 한 줄기 시냇물을 사이에 두고 언제나 함께 하겠다”고 말했다.

시비는 금아의 가르침을 받았던 심명호(73) 서울대 명예교수 등 제자 90명이 함께 세웠다. 시비명 ‘금아시비’는 둘째 며느리인 홍영선(58)씨가, 시 전문은 서예가 조주연 씨가 썼다. 23일에는 ‘인연’ ‘내가 사랑하는 시’ ‘셰익스피어 소네트 시집’등 피천득의 글과 시를 모은 ‘피천득 문학전집’(샘터출판사)이 출간됐다. 그가 사랑했고, 또 그를 사랑했던 이들은 그렇게나마 헛헛함을 달랬다.

남양주=선승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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