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어느 대통령이 낙향하던 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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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역대 미국 대통령중 재임때는 별로 시답지 않던 인물이 두고두고 역사에 걸출한 지도자상(像)으로 떠오른다.트루먼이 본보기다.지난 대선때 클린턴과 부시 후보가 다퉈 트루먼의 고향인 미주리주 인디펜던스 촌구석을 찾았다.서로 자신이 제2 의 트루먼이라 외쳐댔다.
트루먼은 미국을 세번 놀라게 했다.루스벨트대통령이 무명의 시골뜨기를 부통령으로 고른 것부터가 놀라움이었다.두번째 놀라움은전쟁도중 루스벨트가 죽는 바람에 하룻밤새 백악관 주인이 된 것이다.「어물쩍 대통령」(accidental pr esident)이라는 비아냥까지 일었다.문제는 대통령 얼굴을 두번밖에 본 일이 없는 트루먼이 거인이 남긴 큰 구두를 신고 2차세계대전을치러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었다.하지만 트루먼은 승전을 이끌어 82%라는 사상 최고로 인기높은 대통령이 됨으로써 세번째 놀라움을 안겼다.
노태우(盧泰愚)씨는 지금까지 우리 국민을 세번 놀라게 했다.
10.26 혼란때 전방부대를 느닷없이 서울로 돌린 것이 그가 몰고온 첫번째 놀라움이었다.두번째는 죽는 것이 사는 길이라는 6.29선언으로 「어물쩍」 이 나라의 대권을 거머 쥐었을 때였다.지금 벌어지고 있는 盧씨의 세번째 드라마는 국민을 좀처럼 경악에서 깨어나지 못하게 하고 있다.대통령이 나라의 주춧돌이 놓인 이래 가장 큰 도둑의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기네스북에 오른 최고 축재자는 마르코스다.하지만 마르코스의 돈탑은 21년 집권이 쌓아 올린 것이다.연간 축재율로 치면 5년집권 盧씨의 성취는 국내.국외 부문 석권은 물론 「세계 최고」의 초고속 축재 경쟁력을 세운 경이로운 기록이다 .
트루먼과 노태우는 어물쩍 대통령이 된 것은 비슷할지 모르지만한쪽은 역사속의 흑진주처럼 되살아 빛나고,한쪽은 치욕의 나락에떨어지게 된 분기점은 무엇인가.트루먼만큼 숱한 역사적 결단 앞에서 당찬 결단력을 보인 지도자는 드물다.전쟁 끝내기 원폭 결정,유럽을 살려낸 마셜플랜,6.25파병 결정이 그 실례다.맥아더장군 해임 결정은 우리에게 통일을 놓치게한 아쉬움으로 남지만맥아더가 5,000분의1 성공률이라 머뭇거릴 때 인천상륙작전을밀어붙이도록 재가한 것이 트루먼 이었음을 기억하는 이는 별로 없다. 그러나 트루먼의 가장 큰 결단은 공인(公人)으로 스스로를 다스린 결단력이다.그는 늘 로마영웅 신시나투스를 귀감으로 삼았다.농부출신 신시나투스는 나라가 부를 때 칼을 뽑아 제왕에까지 올랐으나 끝내 빈손이 돼 농부로 돌아갔다.지도자는 신시나투스처럼 물러날 때가 중요하다는 것이다.트루먼의 결단력은 거기에서 나왔다.우뚝 선 리더십과 꾸물거림 없는 결단력의 원천은 대권도,「통치자금」도 아니었다.그가 늘 가까이한 역사책인 셈이다. 아이젠하워에게 권력을 넘기고 워싱턴을 떠날 때 트루먼은 빈털터리였다.경호원도,연금도 없었다.사무실도,비서도 물리쳤다.
수입이라곤 육군연금 월 112달러가 전부였다.당장 이사비가 없어 딘 애치슨 국무장관에게 돈을 꾼 사실은 먼 훗날에 야 밝혀졌다.그는 낙향하던 날 비행기를 내주겠다는 것도 마다하고 완행열차에 올라 일반승객과 어울렸다.일본에서 도요타차가 선물로 왔지만 되돌려보냈다.부동산회사와 담배회사등의 온갖 「자리」제의가있었지만 범접도 못하게 했다.행동하는 결 단도 값지지만 유혹을뿌리치는 결단도 돋보였다.퇴임후 「미스터 시티즌(시민각하)」으로 존경받은 이유가 거기 있다.
노태우씨가 갈 곳은 어딘가.재력은 널리 사해에 뻗친 듯해도 갈 곳은 좁아보인다.이웃도,절도 그를 꺼린다.고향마저 반기지 않는다.외국망명도 어림없는 터다.민족의 자존심에 먹칠한 그를 동포들이 그냥 둘 리 없다.지구끝까지 피한다해도 시끄럽지 않을곳이 없다.국민은 盧씨의 네번째 놀라움을 원치 않는다.지혜로운자 역사책에서 배우고,어리석은 자 몸소 피눈물로 배운다는 교훈이 빈말이 아니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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