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심과 소통 … 청와대‘식탁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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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2003년 12월 24일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이듬해 치러지는 17대 총선에 출마할 청와대 비서진과 오찬을 함께했다. 그는 “민주당 찍으면 한나라당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발언이 알려지자 한나라당은 “선거법 위반으로 고발하겠다”고 반발했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일주일 뒤엔 김부겸·송영길·임종석 등 열린우리당 초선 의원들과 만찬을 함께하며 “열린우리당이 더 많은 의석을 확보하기 위해 움직이고 싶다”고 했다. 참석자들 사이에서도 “총선 개입으로 파문이 클 것 같았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 발언들은 결국 이후 탄핵의 빌미가 됐다. 하지만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은 과반 의석을 확보했다.

#지난 13일 청와대 충무원. 이명박 대통령은 한나라당 상임고문단 30여 명과 만찬을 함께했다. 그는 짧은 인사말을 한 것 외에는 대부분 시간을 고문단의 얘기를 듣는 데 할애했다고 한다. 정치권에서 잔뼈가 굵은 고문단은 친박 인사의 복당 문제와 쇠고기 수입으로 악화된 여론의 수습 방안들을 쏟아냈다. 이 대통령은 그러나 마지막 인사말에서도 정치적 발언보다는 “규제 개혁 완화 등을 위해 열심히 하겠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같은 날 오찬을 정두언·정병국 의원 등 측근 4명과 함께했다. 구체적 발언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대통령은 주로 쇠고기 문제로 악화된 민심을 전해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이명박 대통령이 최근 활발한 ‘식탁정치’를 펼치고 있다. 특히 쇠고기 수입 협상으로 여론이 악화된 이후 당내 인사들과의 오·만찬 자리가 잦아졌다. 사실 ‘식탁정치’의 원조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두 사람의 스타일은 그러나 큰 차이가 있다.

한 정치권 인사는 두 사람의 식탁정치를 ‘위기 수습형’(이 대통령)과 ‘정국 전환 주도를 위한 국면 전환형’(노 전 대통령)으로 구분했다. 평소 ‘탈정치형’ 행보를 보이는 이 대통령은 꼭 필요할 때에 식탁정치에 나선다. 최근엔 여론 악화란 이유가 있었다. 정치인들과 평소 소통이 적었던 그는 이번 일을 계기로 당내 인사들의 조언을 듣기 위해 식탁에 적극 초청하고 있다. 내부 소통의 의미가 큰 만큼 대통령의 발언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곤 철저히 보안에 부쳐진다.

반면 노 전 대통령은 자신의 필요에 의해 식탁정치를 적절히 이용했다. 임기 내내 그가 각종 식사 자리에서 쏟아내는 발언들은 언론에 크게 보도됐다. ‘대연정 제안’ ‘2선 후퇴 임기 단축론’과 ‘일본이 공세적 도발을 하고 있다’는 발언도 정치인과의 만찬 자리에서 한 얘기가 새어 나왔다. 그는 동반자들과의 소통보다는 자신의 발언이 국민에게 알려지길 원했고 그만큼 보안의식도 낮았다.

강원택 숭실대(정치학) 교수는 “노 전 대통령은 명백한 정치인의 행보를 보였지만 CEO 출신인 이 대통령은 정치인으로서의 역할을 꺼려 해 빚어지는 차이”라며 “노 전 대통령의 정치 과잉도 문제지만 이 대통령도 대통령이 갖는 정치인으로서의 ‘소통자’ 역할을 좀 더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가영·권호 기자 ideal@joongna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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