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시장을 이기는 정부는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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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정부가 집중적인 물가 관리 대상으로 지목했던 52개 생활필수품 가운데 대부분의 값이 한 달 새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돼지고기·배추·무·양파·마늘 등 농축산물과 휘발유·경유 등 유류 제품은 시장에서 실제로 팔리는 가격이 올랐다. 자장면과 빵·과자류는 판매가격이 오르지 않았지만 양을 줄이는 편법으로 사실상 가격이 인상됐다. 행정력을 동원해 물가를 잡겠다는 정부의 다짐이 무색해졌다. 시장은 정부의 의지와 관계없이 제 갈 길을 간 것이다.

우리는 한 달 전 정부가 가격 관리에 나서겠다고 할 때 이미 실효성이 없을 것임을 예견했다. 정부가 직접 시장에 개입하는 30년 전 물가대책으로는 물가를 잡을 수도 없거니와 시장의 자율 조정 기능을 왜곡하는 부작용만 키울 것이라고 경고했었다. 이제 시장은 정부의 무리한 물가관리 대책이 아무런 효과를 발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 줬다. 정부에 대한 신뢰에 흠집을 남겼을 뿐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여전히 개입과 규제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는 모습이다. 국가에너지절약추진위원회는 여름철 냉방 온도를 26도 이상으로, 겨울철 난방 온도를 20도 이하로 제한하고 이를 어기면 과태료를 부과한다는 에너지 절약 대책을 확정했다. 냉난방 온도 제한은 그동안 공공기관에만 적용했으나 2009년에는 대형 공공시설과 위락시설로, 2010년에는 대형 민간시설로, 2011년에는 일반 주거 및 판매시설로 확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무원들이 무슨 수로 각 가정의 온도를 일일이 측정해 온도 제한 위반행위를 단속할 수 있겠는가. 실행 가능성이 없으면서도 그저 에너지 절약 대책을 내놔야 한다는 생각에 시늉뿐인 새로운 규제를 만들었을 뿐이다.

새 정부는 시장주의를 천명하고, 규제를 대폭 풀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시장에 무리하게 개입하고, 전시용 규제를 새로 만들고 있다. 이래서는 곤란하다. 시장경제 체제에서 시장을 이기는 정부는 없다. 아무리 뜻이 좋다고 해도 정부가 나서지 말아야 할 일이 많다. 시장 원리를 존중하고 무리한 개입을 자제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