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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무엇을 남길 것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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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명박 정부의 첫걸음이 가볍지 못하다. 압도적 승리를 등에 업고 한창 욱일승천의 기세로 뻗어나가야 할 땐데 아직까지 전혀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내각과 비서실 구성에서부터 상당 부분 자초한 잘못으로 삐걱대더니, 요즘은 지난 정권의 이른바 코드인사에 대한 매끄럽지 못한 대응과 한나라당 공천을 둘러싼 계파 전쟁에 매몰돼 새 정부가 하는 일은 잘 보이지도 않는다. 새 정부 출범 후 고작 1달 반 만에 총선을 치러야 하는 정치적 부담이 있다손 쳐도 요즘 모습은 새 정부의 힘찬 출발과 어째 거리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총선이 새 정부 출범과 맞닿아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대단한 행운일 수 있다. 선거 결과에 따라 달라지긴 하겠지만 일반적 예측대로 과반 확보에 성공할 경우, 다음 총선까지 정치적 부담 없는 4년이란 시간이 고스란히 남는다. 현 헌법상 이런 기회는 20년에 한 번밖에 없다.

대통령 단임제가 실시된 1980년대 이후 모두 5명의 대통령이 지나갔다. 누군들 자신의 정권에서 무언가를 이루고 싶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보다 긴 흐름에서 볼 때 역사적 평가를 받을 만한 일은 그리 많지 않다. 80년대 이후라면 내가 기자 생활을 한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그 사이 이뤄진 일 중 역사적 의미를 갖는 것을 꼽는다면 전두환 정권의 물가 안정, 김영삼 정권의 하나회 해체, 김대중 정권의 햇볕정책 정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요즘에야 3% 후반의 물가만으로도 걱정이 태산 같지만, 사실 이 정도의 물가 안정 기반은 전두환 정권이 닦아놓았다. 총통화(M2)증가율 같은 난해한 용어를 예비군훈련장이나 반상회에까지 들이대가며 온 국민에게 물가안정론을 주입하는가 하면, 당시 상상키 어려웠던 추곡수매가 동결까지 동원해 가며 몰아붙인 결과, 지금은 2∼3%를 목표로 삼는 정상적 물가구조의 발판이 만들어졌다. 이는 해방 이후 지긋지긋하게 따라다니던 인플레의 망령을 잡았다는, 중대한 의미가 있다.

김영삼 정권은 하나회를 해체함으로써 이 나라에서 30년 이상 이어져온 군의 정치 참여 루트를 차단했다. 이는 군부 쿠데타와 군사독재 부활의 두려움을 제거했다는 점에서 한국 현대사에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만일 김영삼 정권보다 김대중 정권이 먼저 들어섰다면 사상에 대한 오해 때문에 결코 하지 못했을 것이란 게 내 판단이다. 김대중 정권의 햇볕정책은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 되고는 있지만 우리가 북한을 보는 자세를 확실히 바꾸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명박 정부도 예컨대 인도적 지원은 예외로 한다든지,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이 국민 사이에서 이제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는 등의 구조적 변화는 그 의미가 결코 작지 않다.

이명박 대통령도 분명히 나름대로 역사적 평가를 받을 일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그동안 이른바 747이니 한반도 대운하 같은 핵심 공약들이 나왔지만 그것이 후세의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한 충분한 근거가 될까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고도성장과 경제강국으로의 진입은 박정희 정권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고, 대운하 역시 여러 논란을 떠나 강행한다 해도 경부고속도로의 역사적 의미만큼이나 가질까 의문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역사적 의미를 갖는 도전적 과제는 무엇일까. 나는 연금개혁을 꼽고 싶다. 이 문제는 현재의 모든 국민뿐 아니라 나아가 미래 세대에까지도 영향을 줄 거대한 주제다. 지금 우리 사회의 가장 큰 구조적 변화는 유례없는 고령화 사회로의 진입이다. 고령화 문제의 핵심은 어떻게 미래 세대에 부담을 안-또는 덜-지우고 노령 인구를 부양할 것이냐 하는 문제다. 이를 위한 핵심은 돈이고 그 기반은 현재로선 국민연금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국민연금이란 게 정상적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이 수십년간 불입해도 월 수령액이 일백만원 남짓하고, 그나마 현재의 수급 구조로는 30년 안에 적자 발생, 50년 내에 완전 거덜난다는 것을 번연히 알고 있는 상황이다. 국민연금이 노후의 모든 것을 보장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기초적 생활은 가능케 해야 한다. 노후가 불안하고서는 선진화를 아무리 외쳐봐야 헛일이다. 이 문제를 전면에 다시 부각시키고 해법을 찾아내는 일, 그리고 그것을 성사시켜 미래에 대비하는 일, 이것이 이번 정권에 주어진 최대의 과제이자 역사적 평가의 든든한 토대가 되리라고 나는 믿는다.

박태욱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