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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빈양…정확한 규명 될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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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친일 행위자를 가려내 민족정기를 살리자는 대의에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일제가 물러나고 광복된 지 반세기가 넘었는데도 아직까지 친일 청산이 과제로 남아 있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럽고 안타까운 일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 대목에서 반드시 생각해야 할 점이 있다. 우선 우리 사회가 여야의 극한 대립, 보수와 진보의 대결 등 여러 차원에서 소모적 갈등을 겪고 있는 마당에 법에 의한 친일파 단죄는 자칫 새로운 갈등의 불씨가 될 가능성이 있다. 이 법은 일제의 통치 아래 36년을 견딘 사람들의 친일 여부를 가리기 위한 법이다. 최소한 60년, 길게는 100년가까이 경과한 과거사를 추적하고 판단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제한된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과연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을지 염려된다. 특히 일제가 남긴 공문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왜곡되게 기술돼 있을 가능성이 있다. 예컨대 애국지사가 일제 경찰의 신문 과정에서 독립운동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지사의 행적을 사실과 달리 진술할 수도 있어, 극단적으로는 애국자가 친일적 인물로 둔갑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고, 증언해 줄 이들도 대부분 세상을 떠난 지금 이를 정확하게 바로잡고 복원시키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따라서 객관적 진상규명 작업은 절실한 일이지만 의욕만큼 이뤄질지는 의문이다. 만의 하나 억울하게 친일 인사로 분류될 경우 그 후손들이 입을 고통과 피해는 누가 보상할 것인가. 정말 사려깊은 심사가 이뤄져야 한다.

지금의 잣대로 식민지시대의 행위를 재단하는 것이 타당한지에 대해서도 심사숙고해야 한다.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벌였던 사람은 예외지만 국내에 있었을 경우 이런 저런 사유로 친일의 굴레를 벗어나기 힘들었던 것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일제의 악랄한 철권통치라는 당시의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순응한 다수의 인사까지 친일파로 매도될 경우 그 파장은 심대할 것이다. 특히 광복 이후 친일파 문제가 정적에게 타격을 입히거나 매장하기 위해 이용됐던 상황을 생각하면 불길한 예감까지 든다. 정치적 반대자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공격을 일삼는 요즘 세태을 보면 더욱 그렇다. 자칫 혼란과 분열.갈등으로 국력은 끝없이 소모될 것이다. 국회의원들은 도대체 이런 점을 알고도 이 법을 통과시켰는지 모르겠다.

친일 청산 문제를 둘러싼 복잡한 구조와 파장을 생각한다면 이 법의 제정에 신중했어야 했다. 법을 만들어 처벌하기보다는 역사가들의 손에 넘기는 것이 현명했다. 시대와 인물에 대한 입체적 접근을 통해 공정하고 객관적인 잣대로 친일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그래야만 친일 행위자로 분류된 인사와 그 후손들도 역사와 민족 앞에 진정으로 사죄하고 국가발전에 동참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될 것이다. 조금이라도 억울하다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결과에 승복할 수 있겠는가.

적대와 대결을 조장하는 이 법의 제정을 흥분과 격정 속에 전가의 보도로 받아들여선 안 된다. 민족 공동체의 진정한 이익을 생각하면서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숙고해야 한다. 친일 청산은 필요한 일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공동체의 반목과 갈등을 예방하는 일도 중요하다.

한승섭.서울 양천구 목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