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시평>"포레스트 검프"의 교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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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지난 정초 미국을 여행하던중 실리콘 밸리의 한 회사를 방문할기회가 있었다.「실리콘 그래픽스」회사(SGI)였다.얼핏 보기에는 작은 규모의 회사 같았는데 알고본즉 직원 5천명에 94년의매출액이 20억달러(약 1조5천억원)나 되는 만만찮은 회사였다.그러나 그같은 외형상의 규모보다 막상 흥미를 느낀 것은 이 회사가 「초고속 정보고속도로」등 멀티미디어 시대를 선도하는 첨단 산업체라는 점,특히 『쥬라기 공원』『터미네이터』 『포레스트검프』같은,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영화들의 실감나는 장면들이 이 회사의 컴퓨터 그래픽 기술에 의해 완성될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회사측의 안내인은 몇몇 영화의 화면을 보여주면서 가령 공룡(恐龍)들의 모습이 어떻게 그처럼 생동감 있을 수 있었는지,검프가 케네디 대통령과 만나는 장면이 어떻게 그처럼 진짜같이 보일수 있었는지를 친절하게 설명했다.그 영화들의 전 세계적인 흥행성공에 이 회사 컴퓨터 그래픽 기술이 결정적 역할을 했음을 의심치 않게 하는 것이다.
지난주의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포레스트 검프』가 작품상.감독상.남우주연상등 6개 부문상을 휩쓴 것도 이 작품의 주제(主題)를 뒷받침한,실감있고 생동감있는 화면 구성이 한몫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주인공이 60년대의 케네디. 존슨.닉슨 대통령을 만나는 장면,비틀스 멤버일 당시의 존 레넌을 만나는 장면,멀쩡하던 다리가 몽땅 잘린 채 등장하는 옛 소대장의 모습같은 것들이 어설프게 처리됐던들 이 영화의 가치를 형편없이 떨어뜨렸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이 영화에 쏟아진 최대공약수적인 찬사가 『작품성과 흥행성이 훌륭하게 조화를 이뤘다』는 것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우리의 재래식 영화감상 기준에 비춰보면 50년대부터 70년대에 이르는 시기의 역사적 사건들을 배 경에 깔면서한 저능아의 인생역정을 담은 이 영화가 그처럼 폭발적인 인기를얻은 까닭이 얼핏 이해되지 않는 측면도 있다.
주제의식이나 영상예술의 관점에서라면 몰라도 섹스와 폭력만이 흥행의 기본적인 요소처럼 간주되는 오늘의 영화풍토에서 『포레스트 검프』는 우선 주제 설정이나 스토리 전개에서 흥행성을 뒷받침할 요소는 별로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두 자릿수의 지능을 가지고 태어난 검프가 미식축구 스타로,베트남전쟁의 영웅으로,탁구선수로,재벌로 변모해가는 과정이 흥미롭고 옛 애인과의 헤어짐과 만남,그리고 죽음이 가슴 뭉클한감동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하지만 그같은 흥미나 감동조차도 이영화가 지니고 있는 리얼리티에 크게 힘입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다른 예술분야에서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영화에 있어서의 리얼리티는 생명과도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단순하고도어설픈 눈가림으로 관객을 속여넘 길 수 없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더구나 하루가 다르게 그 기술이 발전하고 있는 컴퓨터 시대에,멀티미디어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형성해야할 영화예술이 안이한 재래식 방법으로 리얼리티를 살려내려 제아무리 애쓴들 관객의 공감을 얻어내기란 불가능하다.우리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가령 집권초기의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이나 데뷔 초기의 패티 김.이미자(李美子)를 영화속에 등장시킬 필요가 생겼을때 우리 영화인들이 생각해내는 방법은 무엇일까.기껏해야 당시의 필름을 교묘하게 삽입하든가,가장 비슷한 인물을 찾■ 내려 애쓰는게 고작일 것이다.
이탈리아의 화가며 과학자였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이미 15세기에 과학과 예술의 밀접한 관계구도를 역설했다.과학자는 예술가적 안목으로 끊임없이 사물을 관찰해야 하며,예술가는 끊임없는과학자적 탐구정신으로 예술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 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그렇다면 5세기 이상의 장구한 세월이 흐른 지금 우리의 영화가 과연 얼마만큼의 과학자적 탐구정신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화면의 생동감 한몫 「권력과 음모,명성의 덧없음,그리고무엇보다 허영의 도시 할리우드에 주어지는 상」이라는 소리를 들어온 아카데미영화상이 이번 『포레스트 검프』의 석권으로 면목을일신하게 된 것도 이제 영화예술이 과학과 기술을 배제한채 어설픈 예술성 만 좇다가는 시대에 뒤떨어진 예술로 전락하기 십상이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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