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마을] 노래방 소화기 사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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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겨울. 제대한 지 얼마 안 된 예비역으로서 오랜만의 자유를 한껏 즐기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평소 동네에서 잘 알고 지내던 친한 형이 별일 없으면 성탄절에 같이 놀자더군요. 예비 형수님과 형수의 직장 여직원 동료와 같이 보내자는 제안이었습니다. 이게 웬 떡이냐 싶었죠. 할 일, 당연히 없었지만 있더라도 없다고 했겠지요. 제가 솔로였거든요.

기다리던 그날 나름대로 멋지게 차려 입고 약속 장소로 달려나갔습니다. 만나자마자 술잔을 연거푸 돌렸습니다. 성탄과 연말 분위기도 한몫했지요. 술집을 나올 즈음엔 너나 할 것 없이 얼큰하게 취했습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노래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제가 노는 데 일가견이 있거든요. 군대에서도 제가 마이크를 잡았다 하면 모두들 ‘난리 부르스’였지요. 평소 한가락 하는 형도 탬버린을 마구 흔들고 춤을 추며 기분을 돋우었습니다. 흥이 오르자 형이 노래방 구석에 있던 소화기통을 번쩍 들더군요. 그러고는 방송국 카메라처럼 어깨에 메고 빙글빙글 방 안을 돌았습니다. 분위기는 클라이맥스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뒤쪽에서 ‘쉬이~익'하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뭐야 하며 고개를 돌리는 순간 하얀 연기가 제 머리 위로 확 퍼졌습니다. 보니 이미 뿌연 소화기 분말가루가 사람들은 물론 노래방 여기저기를 뒤덮은 상태였습니다. 술이 과했던 형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소화기의 안전핀을 뽑고는 손잡이를 눌렀던 겁니다. 노래방 주인 아줌마 치맛자락 붙들고 싹싹 빌었죠. 마이크와 탬버린 대신, 빗자루와 대걸레를 들고 쓸고 닦고 하다가 나오니 먼동이 트더군요. 우리는 가까운 포장마차에 들러 하얗게 염색된 서로의 머리를 보며 낄낄댔습니다. 쓰디 쓴 소주잔을 부딪치며 우리는 외쳤죠. 메리 크리스마스.

형수의 직장 여직원 동료, 지금은 제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여자친구랍니다.

김윤태 (28·대전시 중구 선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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