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있는풍경>충북제천 하기원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2면

소나무가지에 흐드러지게 핀 눈꽃이 무거워 절로 툭툭 떨어져 내리는 천등산 고갯길을 달리는 것은 고단한 일상사와 잠시 작별하는 일이다.
『평생을 서울에서 살아온 사람도 늘그막에 시골에서 새삼 즐거워지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는 전화를 받고찾아간 곳은 충북제천시백운면운학리(서울 시청에서 약 1백40㎞거리). 「울고 넘는 박달재」못미쳐 왠지 「개벽 이후 처음 열린 동네」같은 이 마을 모습에 끌려 4년전 60여년의 서울생활을 정리해 이곳에 왔다는 하기원(河基元.70),김정순(金貞順.
62)씨 부부.온 마을이 눈속에 잠겨 고요한데 마치 매우 좋은일로 분주한 듯 활기찬 표정을 하고 있었다.
휘문중학과 서울사대를 졸업한 후 교사와 공무원으로 평생을 서울에서 살아온 하씨 부부는 눈길을 헤치고 찾아든 손님을 위해 뜨거운 대추차와 고깃살이 쫄깃쫄깃한 토종닭을 잡아 냈다.
흙과 통나무를 엮어 지은 촌가의 방바닥은 장작불을 잔뜩 지펴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추위를 녹이기에 안성맞춤이었다.열어제친창호지문 너머로 흰 눈이 사각사각 내려 쌓이는 모습이 평화로웠다. 『공기가 정말 맑지 않아요? 이곳에 온 후 매년 앓던 감기가 뚝 떨어졌는데 맑은 공기 때문이래요.』 하씨 부부가 이곳에 온 것은 우연한 기회에 이 근처를 지나다 이곳 풍광에 반해버린 장남을 따라 구경온 후 그들 역시『이곳에서 생을 마감하고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평당 2만원을 주고 1천여평의 땅을 사 생전 안하던 농 사법을 배워가며 차츰 농촌생활에익숙해진 부부는 지난해 꽤 많은 농사를 지어 쾌재를 불렀다.
우선 부부와 6남매 가족을 위해 무공해 농사를 짓는 일만도 그들에게는 스스로가 대견했다.
좋은 품종의 씨앗을 얻어 지난해 30여가지의 농사를 지었다.
김장용 배추도 5백여포기 거뜬히 수확했고 고추.토마토.콩.파등식생활에 필요한 채소를 모두 길러냈다.그동안 심었던 유실수가 자라 대추.복숭아.포도.사과등 과일도 모두 자급 자족할 수 있었다.그뿐인가.뒷산에 올라가 채취한 약초 뿌리와 씨앗들을 심어식구들의 몸보신에 좋은 천궁과 당귀.황귀.작약등 약초농사도 그럴싸하게 지어냈다.
틈틈이 운동삼아 산에 올라 고사리.취나물도 뜯어말린 것이 그득해 세상에 제일가는 부자같다는 생각이 든다.매일 토종닭과 거위들이 낳는 알을 챙기는 재미도 좋고 여름이면 바로 집 앞을 흐르는 냇물가에서 쏘가리.메기.꺽지등을 잡아 매운 탕을 끓여먹는 것도 놓치기 아까운 흥취다.
요즘같이 깊은 겨울에는 가끔 먹이를 찾아 마을로 내려온 너구리.고슴도치.산토끼들을 만나기도 한다.뒷산에 누군가 쳐놓은 덫들을 슬쩍 치워버리기도 한다.마을사람들은 늦가을에 파종한 무씨가 싹이 나 비닐하우스 내로 옮겨심는 작업을 하고 산더덕을 캐기 위해 겨울산에 오르지만 하씨는 농사욕심으로 지난 여름 밀쳐놓았던 책들을 다시 손에 잡기 시작했다.올 겨울에는 대하장편소설 한질을 모두 독파할 예정이고 봄이 되면 집둘레에 가득 심을유실수를 나무시장에 가서 슬슬 장만 해야 한다.
[堤川=高惠蓮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