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섬기며 배운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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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호 10면

1. 1년 예정으로 세계 봉사여행을 하고 있는 나병도·서정은 부부와 나윤빈·나윤송 형제가 캄보디아 시엠리아프에 있는 ‘다일 공동체’ 캄보디아 지부 앞마당에서 촬영에 임했다. 나씨 가족은 이곳에서 열하루 동안 ‘밥퍼 봉사’와 설거지·청소·시설보수·환경정리 등을 했다.

어느 날 갑자기 모든 일상을 훌훌 털어버렸다. 좋은 직장도 미련 없이 사직했다. 그러고는 훌쩍 세계 방랑길에 올랐다. 아내와 두 아들도 함께 따라나섰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아이들은 휴학을 해야 했다. 명승지를 찾아다니는 유람이 아니었다. 세계 오지의 궁핍한 나라들만 돌며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봉사여행이었다. 일가족 4명이 1년 일정으로 ‘세계 오지 봉사활동’에 나선 것이다. 여행도 하고, 봉사도 하는 긴 ‘구도여행’이었다.

박상주가 만난 사람-일가족이 봉사여행 나선 나병도씨네

봉사와 여행을 한꺼번에
11월 3일 앙코르와트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진 캄보디아 시엠리아프에서 만난 나병도(40)·서정은(39)·나윤빈(11)·나윤송(7) 가족이 그 주인공이다. 시엠리아프 시내에서 아시아 최대의 민물호수인 톤레삽으로 가는 길목에 뜻밖에도 ‘다일 공동체’라는 한글 간판이 영문가표기와 함께 높다랗게 내걸린 곳이 있었다. 노숙자를 위한 ‘밥퍼 봉사’로 유명한 최일도 목사의 ‘다일 공동체’ 캄보디아 지부였다.

‘밥퍼 봉사’가 이미 끝난 오후 2시쯤 다일공동체 마당으로 들어섰다. 단층 빌딩 세 동이 ‘ㄷ’자 모양으로 들어서 있었다. ‘밥퍼 봉사’ 시간이 지난 탓인지 아주 한적했다. 한 사내아이가 마당을 쓸고 있었다. 또 다른 사내아이는 손수레로 쓰레기를 실어 나르고 있었다. 윤빈·윤송 형제였다. 아빠 병도씨는 건물 뒤쪽에서 쓰레기를 태우고 있었다. 온통 새카맣게 탄 얼굴에 더부룩한 수염, 몸에 달라붙을 정도로 흥건하게 땀범벅이 된 티셔츠…. 그는 쓰레기로 뒤덮인 뒤뜰을 정리하고 있는 중이었다. 엄마 정은씨는 한쪽에서 벽돌을 정리하고 있었다.

2.‘앙코르의 미소’라고 불리는 바이욘 사원의 거대한 불상. 3.크메르 제국 앙코르 왕조의 전성기를 이룬 수리아바르만 2세가 건립한 앙코르와트 사원. 4.아시아 최대의 민물호수인 톤레삽에 들어선 수상가옥들.

“어제는 쓰레기 더미에서 튀어나온 독사한테 하마터면 물릴 뻔했습니다. 길이를 재보니 2m나 되는 뱀 두 마리, 1.5m 짜리 독사 한 마리였어요. 함께 일하던 캄보디아 봉사자들이 곡괭이로 때려잡아 잔치를 벌였습니다. 여기서는 아주 귀하고 비싼 음식이라면서 좋아하더군요.”(병도씨)

그날 오후 7시쯤 병도씨네가 묵고 있는 숙소를 찾았다. 하루 5달러짜리 호스텔이었다. 숙식비를 포함한 일가족의 하루 여행경비가 25~30달러 정도라고 했다. 호스텔 뜰에 있는 작은 노천카페에서 자정 무렵까지 맥주를 마시면서 병도씨와 정은씨의 이야기를 들었다.

결혼 10주년 약속으로 나선 해외여행
그들은 왜 길을 나섰을까. 나씨 일가족이 봉사여행을 떠난 것은 올 7월이었다. 정보기술(IT)업체인 (주)엔터기술의 독일지사 주재원으로 프랑크푸르트에서 근무하던 병도씨는 본사 발령을 받은 일을 계기로 사직한 뒤 배낭을 꾸렸다.

“1995년 12월 결혼하면서 아내와 한 가지 약속을 했습니다. 결혼 10주년 때 함께 장기 해외여행을 떠나자는 거였죠. 조금 늦게 약속을 지킨 셈입니다.”
병도씨 가족은 19년 된 고물 벤츠 캠핑카에 세간을 가득 싣고 프랑크푸르트를 출발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루마니아·불가리아·그리스·터키·시리아·태국 등을 거쳐 지금의 캄보디아까지 왔다고 했다.

“루마니아와 불가리아, 터키 등 못사는 나라를 지날 때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세간을 하나씩 나눠줬습니다. 자전거·옷·그릇·장난감·책 등을 하나하나 내주기 시작했죠. 중간에 캠핑카까지 처분해 여행경비에 보탰어요. 시리아까지 왔을 땐 나눠 줄 게 남아 있지 않더군요. 그때부터 몸으로 때우는 봉사를 찾기 시작했습니다.”(정은씨)

그들은 다음 행선지에서 무슨 봉사를 할 것인지 인터넷 검색을 하기도 하고, 직접 현지에서 봉사활동 거리를 찾기도 한다고 했다. 이곳 다일 공동체에서는 열하루 예정으로 ‘밥퍼 봉사’와 설거지·청소·시설보수·환경정리 등을 하고 있으며, 오늘이 나흘째라고 했다.

그런데 봉사면 봉사요, 여행이면 여행이지 봉사여행은 또 뭔가.
“이번 여행은 우리 부부의 구도여행입니다. 불혹을 맞아 각자 이제까지의 삶을 돌아보고, 가족의 의미도 새기고, 아이들에게 더불어 사는 세상의 중요함도 가르치고. 가톨릭 신자로서 나눔을 실천하는 좋은 기회이기도 합니다.” (정은씨)

신이 내린 짜릿한 선물 ‘여행’
정은씨는 대학(국민대 86학번) 졸업 후 활발하게 사회봉사 활동을 했다. 90~91년 정릉 빈민촌 ‘밝은 어린이집’ 교사, 92~94년 지역사회탁아소연합회 간사, 94~97년 한국보육정보연구소 소장 등을 역임했다. 결국 이번 봉사여행은 정은씨의 봉사 욕구와 병도씨의 여행 욕구를 모두 만족시키는 것이었다.

“여행은 신이 인간에게 내린 많은 선물 중 가장 짜릿한 선물입니다. 여행을 다니면 숨어 있던 열정이 꿈틀꿈틀 되살아납니다. 여행을 다니면 내 자신과 내 주변을 내 눈으로 되돌아볼 여유를 되찾게 되지요.”(병도씨)

신이 내린 그 짜릿한 선물을 만끽하기 위해 병도씨는 대학 시절부터 무던히도 돌아다녔다.

“넓은 세상을 보고 싶었고, 나 자신을 찾고 싶었습니다. 대학(한국해양대 86학번) 재학 시절부터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어 중국과 일본 등 해외여행을 일곱 차례 했습니다. 93년 졸업 후엔 아예 작정을 하고 세계를 누볐어요. 그해 2월부터 94년 말까지 1년10개월 동안 유럽·러시아·중국·인도·동남아·중앙아시아를 돌아다녔습니다. 여비가 떨어지면 일을 했죠. 프랑스 포도밭에서 6주간 포도를 따기도 했고, 네덜란드에서는 석 달간 자원봉사를 했고요.”

정은씨도 남편 못지않은 여행 예찬론자다. 2005년 남편의 임지인 독일로 갈 때도 정은씨와 두 아들은 3개월 동안 인도와 중국, 동유럽 등지를 여행하면서 들어갔다.
부모들이야 자기들 좋아서 여행을 한다고 치자. 선택권이 없는 아이들은 뭔가. 남들은 학원이다 과외다 야단인 세상이다. 도리어 부모가 앞장서 윤빈과 윤송이의 ‘학교 땡땡이’를 조장하고 있으니 ‘나쁜 부모’가 아니냐고 물었다.

“세상을 직접 몸으로 체험하는 것보다 더 큰 공부가 어디 있습니까. 더군다나 1년쯤 학교 늦게 졸업한다고 인생이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고요. 저녁마다 하루 세 시간씩 엄마·아빠가 번갈아 가며 공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아이들이 여행하는 걸 좋아해요.”(정은씨)
부전자전(父傳子傳), 모전자전(母傳子傳)이라.

*‘박상주가 만난 사람’ 연재를 마칩니다. 봉사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준 필자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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